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사라진 농부 심명섭 씨

포토 에세이 제1082(2020.9.2)

이득수 승인 2020.09.01 14:43 | 최종 수정 2020.09.01 15:04 의견 0
 사진2.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배추골을 타는 친구
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배추골을 타는 친구

한 학년에 35명이 입학한 1967년 언양농업고등학교의 분위기는 마치 초상집 같았다. 남학생 3학급, 여학생 1학급의 언양중학교와 상북중학교가 있어 예년이면 보통 100명 이상의 학생이 입학 하여 농업과와 원예과 2개 반으로 편성하던 언양농업고등학교가 그해에는 35명짜리 1학급에 그쳤다. 동기생 중의 하나가 그였다.

당시 우리가 살던 언양지방의 외관이나 인심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놀랍도록 변해 갔디. 그건 반만년의 보릿고개를 물리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울산을 중심으로 정유공장, 비료공장 등을 건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울산이 그 최초의 공단이 된 것은 지역여건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실세이던 중앙정보부장이 바로 울산 웅촌면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여간 그렇게 공업용수, 농업용수로 쓸 두 개의 댐을 건설하고 공장을 짓는 사이 울산에는 울산공업고등학교와 울산여상 등 실업계학교를 세우고 그 배후지인 언양에도 언양여중과 여상을 지어 언양중학교와 언양농업고등학교이 학생이 새 학교로 몰려가니 학생수가 적을 수밖에. 
 
거기에디 농업학교 농업과란 명칭만 걸었지 어서 졸업을 하고 울산의 비료공장에나 취직하려던 아이들은 아예 학교수업에 관심이 없어 벼, 보리같은 보통작물을 보작, 토양과 비료를 도깨비라 부르며 누구도 그 제목의 뜻마저 익히지 않으려 했다. 대학진학에 필요한 국영수는 나와 정연주라는 친구 딱 둘이 배우고 고 3때 영어는 서익수 선생과 이득수 학생의 가정교사 체계로 바뀌다시피 했다.

그 고3의 짱개 <심명섭>군은 신복이라는 마을에서 농사도 짓고 방앗간도 운영하는 부잣집아들로 아주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당시 농업학교 3학년은 실습자리만 구해와 등록금만 제때 내면 고속도로 측량보조를 하든, 관정(管井)이라는 관개용 우물을 파는 현장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실습을 나가고 나도 연습삼아 친 울주군 5급을류시험에 응시해 수석합격, 조건부지방행정서기보 5급을류로 삼남면사무소에 출근하게 되었다.

그렇게 1969년에 헤어진 <짱깨>를 내가 다시 만난 건 무려 35년이란 세월이 흘러 초로의 신사로 변해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부산서구청의 기획감사실장으로 근무하던 내가 동료 몇을 거느리고 삼남면 가천리에서 신불재를 올라 신불산을 넘고 간월재를 통하여 하산하여 등억리의 한 식당에 닭백숙을 시켜놓고 술추렴을 벌일 때였다. 우리의 술상 앞에 바로 열린 도로에 우리 또래의 사내 하나가 훌쭉한 배낭을 어깨에 메고 걸음연습을 하는데 이미 왼쪽에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 모양으로 걸음걸이가 많이 비틀거려 금방 넘어질 것 같았는데 몇 걸음 뒤에 그의 아내인 듯한 여인이 뭐라고 소리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야, 명섭아!”
“득수야!”
둘이 부둥켜안았다. 농업학교 3학년시절 <짱개>였던 것이었다.

그날 그에게 듣기로 그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몇 번의 직장을 거쳐 온산공단의 엘지화학에 취직을 해 무려 35년을 아황산가스를 생산하는 일을 맡아 꾸준히 승진을 거듭하고 집도 마련하고 대학생 딸 둘을 공부시키는 화목한 가장이 단번에 그의 중풍을 동시에 맞았다고 했다.(당시에는 누구라도 공해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시절이라 그도 나도 그 원인이 화공약품에 있다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졸업식 앨범의 심명섭(좌)과 필자(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외손녀까지 본 내가 대구로 한경길이라는 운동화도매상의 딸 결혼식을 참석했는데 모두들 명섭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그 현실을 설명해주고 잔칫집에서 동창회에 주는 사례금과 각자 개인부조에 주는 답례봉투까지 걷어 울산의 친구 명섭 씨를 문병했는데 당시는 상태가 안 좋아 조그만 아파트의 방에 누운 그의 얼굴을 보고 위로한 뒤 저녁 값만 남긴 모든 돈을 탈탈 털어 그의 부인에게 주고 헤어졌다.

그러고 또 한참 세월이 흘러 이제 정년퇴직을 한 내가 마침내 무한대올 주어지는 시간 앞에서 현직시절 그렇게 원을 했던 <책읽기>와 <글쓰기>에 도전했지만 어쩐지 책상 앞에만 앉으면 머리통이 텅 비어버려 아무것도 못하고 무려 3년을 허송세월했다. 그래서 내가 40년이나 밥벌이를 했던 관물을 빼야만 된다는 생각에 집에 배달되는 스마트부산도 읽지 않고 퇴직공무원모임이나 모든 문인회, 작장이나 친지들의 친목회도 모두 탈퇴했다. 그렇게 한 3년 구서동 럭키아파트 앞 골짜기의 남의 밭을 빌려 주말농원을 하며 세월을 보내 공무원의 땟물을 씻어내고 마침내 2012년 8월에 내 필생의 작품이 될 대하소설 <신불산>의 집필에 연착륙해 매일 몇 장의 글을 쓰는 행복한 삶, 실로 내가 50년 넘게 꿈꾸던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로 구서동의 밭을 빌려준 교장선생님이 치매가 와서 80이 넘어 지게를 못져 몽땅 내가 언양에서 구해서 올린 쇠똥거름이나 금정농협에서 나온 비료를 내가 훔쳐갔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우리부부가 저 아래 먼 산복도로에서 지고 온 것인데도 저녁만 되면 전화로 우리 집에 전화를 해 <거름도둑>으로 몰고 평소 심술궂다고 소문이 난 부인이 하도 패악을 부려 구서동 밭을 포기하고 기장군 장안읍 오리라는 허허벌판을 얻어 맨땅 200평을 얻어 농사를 지으며 밤에 글을 쓰자 이번엔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여주인이 갖가지로 지주(地主)티를 내며 내게 온갖 산업쓰레기가 다 매립된 땅을 사라고해서 할 수 없이 고향 언양으로 올라와 글을 쓰려 등말리에 집을 짓다가 급성 간암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 농사는커녕 마초와 함께 간신히 산책이나 하는데 문득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온 것이다.(다음 회에 계속)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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