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천리 후리부락 앞 바들뜰(작천정 지나 간월계곡 가는 길에서 오른 쪽 샛길로 명촌리를 거쳐 면사무소가 있는 산전리, 석남사 방향으로 가는 길, 그러니까 제가 사는 등말리 뒤쪽에는<바들못>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저수지의 이름이 인근주민들은 <바들못>, 어떻게 들으면 버들이 우거진 버들못으로 푸르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부릅니다만 군청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는 <파도못>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바다의 큰 물결 파도(波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경상도 사람들의 억세고 사나운 욕설(대가리 뽀사뿐다. 머리통 깨사뿐다.)라는 무시무시한 이름 <파두(破頭)못>에서 유래했답니다.
그 무시무시하고 고약한 이름이 왜 생겼는지도 궁금하지만 벼농사를 좀 지어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왜 이 평평한 평지 한 가운데에 이런 저수지가 생겼나, 저 깊고 넓은 <소목골못, 제가 늘 산책을 가는 골안못>의 저수량만 해도 충분할 것인데 마치 어느 지방정부 독재자가 자기심복을 위해 만든 <위인설관(爲人設官)>의 자리처럼 <못 아래 못>을 왜 팠을까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만감한 문제의 해답을 길천리 후리마을에서 소목골을 향하는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우거진 유서 깊은 성황당을 조금 지나 아늑하게 자리잡은 <소목골쉼터>라는 작은 정자를 실마리로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후리마을이 속한 길천리는 옛날 울주군과 언양 일대에서 규모는 작지만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산너머 이천리(배내골) 분교까지 거느린 <길천초등학교>와 길천산업단지로 거의 언양읍에 버금가게, 면소재지 산전리보다 훨씬 더 이름이 알려진 이 길천리, 그 중심인 후리마을에 대해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지금의 상북면은 해방 전까지 태화강의 남북으로 나누어 그 남쪽의 후리마을에 <상남면사무소>가 소재해 얼마 전까지 초등학교와 면사무소, 파출소, 옛 향교와 천주교의 공소에 기독교의 교회까지 소재해 완전한 소읍의 기능을 가춘 가구수 100호가 넘은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어느 왕조에 후리마을 남쪽 후리뜰에 제(諸)씨 성 가진 천석군이 이사와 살았다고 합니다. 옛날 조선의 군대제도는 양반과 노비, 백정 등을 뺀 상민만 한양이나 변방에 몇 년씩 근무를 하는 번(番)을 서고 그 벌충으로 이웃의 상민들이 돌아가면서 병정으로 나간 집의 농사를 도와주는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벼슬은 않고 유생의 흉내만 내는 향반(鄕班) 또는 부유한 상민으로 짐작되는 이 제씨네 집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윤상(倫常)범(존속살해나 폭행, 상피등 반역보다 더 엄중한 죄)이 발생했는데 바로 그 제(諸)부자(富者)인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죽은 나무도 상피를 붙는다는 어느 무르익는 봄날 잘 먹고 잘 놀아 쌀이 디룩디룩 찐 이 제부자가 갑자기 엄청난 음심(淫心)이 발동, 외지에 번을 나간 아들의 처, 며느리를 겁탈하러 며느리의 방에 난입한 것입니다(일설에는 딸).
이에 깜짝 놀란 며느리가
“아버님, 이는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나 저지를 만행이니 제발 참으시고 기어이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시려면 머리에 삿갓을 쓰고 저 골안못 위의 골짜기에 가서 우우 우우, 소울음을 세 번 울고 내려오면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우선 급한 위기를 넘기고 눈이 뒤집힌 시아버지가 골안못으로 달려가기 바쁘게 금방 처마에 목을 매어 자결한 것입니다.
이 해괴한 소식을 접한 당시의 왕이 불같이 대노(大怒)해 우선 그 집터를 불태우고 제부자와 삼족을 멸한 뒤에도 분이 덜 풀려 그 집터에 연못을 파서 그렇게 <대가리를 뽀사뿌는 못> 파두못이 생겨난 것입니다.
옛 농경시대에 대표적인 부녀상간 또는 성적 착취의 전설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의 현장이 바로 제 집 뒤에 있어 조석으로 산책을 하고 음풍농월 시를 읊는 쉼터가 그 참혹한 전설의 고향이라니요?
그러나 제가 자랄 시절 중학생이 되면 언양읍은 물론 서부 5개면의 모든 아이들이 다 모여들어 별의 별 성씨가 다 있었는데 저 유명한 제갈공명의 제갈(諸葛)씨, 그 글자를 양분한 제(諸)씨와 갈(葛)씨까지 3성이 동성(同姓)이라는데 언양토박이인 제가 햑교에 다닐 때나 일흔이 넘은 지금이나 근방에서 제씨, 또는 제갈씨나 갈씨를 만난 일이 없으니 그렇게 멸문지화를 당해 언양바닥에 발을 붙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 울음을 세 번 내었다고 소목골(나중에는 우목골)로 불리는 그 치욕적인 이름을 오늘날 현지인들은 그게 무슨 의미 깊은 전설로 착각하고 아까 말한 소목골쉼터를 짓고 지도에 까지 소목골, 또는 우목골로 기록된 데다 그 소목골 입구의 조그만 암자에서는 그 이름이 큰 자랑거리처럼 <소목골의 노래>를 지어 그 가사를 돌에 새겨 세워놓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불쾌한 전설은 물론 이 포토 에세이조차 불쾌해 할 마을분들이 계실 것 같아 우선 이 이야기가 <울주군지>와 <상북면지>에 기록된 것임을 밝힙니다. 아울러 어느 독지가가 나와 <소목골쉼터>를 비롯한 관계지명이 이제 더 이상 퍼져나지 않고 시간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그런 뜻 있는 사업을 해주시면 좋겠다는 제 의견을 덧붙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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