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천전리 상피바위의 전설

포토 에세이 통산 제1077호(2020.8.28)

이득수 승인 2020.08.27 16:39 | 최종 수정 2020.08.27 20:20 의견 0
천전뜰에서 본 상피바위(7부 능선 숲이 움푹 패인 곳) [사진=이득수]
천전뜰에서 본 상피바위(7부 능선 숲이 움푹 패인 곳) [사진=이득수]

여러분들께서는 엊그제 한갓 시골영감인 마초할배가, 그것도 말기암환자의 피폐한 심신으로 우리 한반도를 이어온 6개의 왕조와 그 시대적 특징에다 저 넓은 만주와 중원을 다 버리고 한반도에 칩거하며 마침내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전락한 사실을 통탄해 마지않고 

또 그 여섯 개의 나라 중 직전의 조선왕조 500여 년이 가장 합리적인 유교이념으로 탄생하였음에도 그 현실에 있어 왕과 벼슬아치들이 가장 잔혹하고 지방의 관리들이 가장 부패해 왜와 오랑캐의 두 번의 침탈에 왕궁이 불타고 왕이 몽진하며 논밭이 황폐해져 먹을 것이 없으며 죄 없는 부녀자와 상민, 노비와 하층민들이 한없이 비참한 곤궁을 겪어 엄청난 숫자가 굶어죽고 얼어 죽고 간신히 살아남은 부녀자와 노비들도 차마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적 왜곡과 착취를 당해 가장 동물적이고 가장 비정한 왕조였음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갑갑하고 암울한 이야기는 오늘부터 3일 연속으로 나갈 언양 지방의 전설 중에 사대부와 관리, 부자들에게 죄 없는 아녀자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왜곡되고 학대받았는지 그 부조리를 <울주군지>와 <삼남읍지>에 나오는 <전설>편을 전거로 삼아 차분히 풀어가 것이오니 다만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지금 천전리에서 명촌리로 올라가는 길로 옛날 열녀각이 있던 자리에서 남쪽의 야산을 바라보면 약 100m 높이의 짙은 숲속에 10m가 됨직한 커다란 바위동굴이 한여름의 녹음에 녹아들면서도 여전히 시꺼먼 아가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마주보는 상북면 향산, 능산 모단쪽에서는 굴바위로 부르지만(사실상 굴바위는 송대리의 굴암사로 또 다른 활명도화活命桃花의 전설이 있음) 그 굴바위를 돌아앉은 마을에서 상피(相避)바위, 남녀 간, 특히 같은 가문의 남녀가 절대로 통해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남녀관계의 음험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소수의 양반이 다수의 상인과 노비 같은 하층민을 핍박하고 착취하며 살아온 아침의 나라, 조선이란 이름만 번지르르한 유교국가에서 가장 무능한 사내, 남의 짐 머슴살이를 하는 노총각이나 종복들은 어떻게든 여인과의 접촉할 기회가 없어 일생에 단 한 번 여인의 속살을 접해 몽달귀신을 면하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갈 확률이 단 5%도 안 되는 비참한 현실인 것이었습니다.

그걸 어느 시골양반집을 예로 들어 진사나 생원으로 불리는 나리는 소년 적에 부모가 정해준 자신보다 두 세 살이 많은 아내로부터 마치 동생 같은 자식들을 낳아 키우면서 명망 있는 가문의 유세나 자랑거리처럼 나이 40전후로 족보에 있는 한미한 양반이거나 족보도 없는 논다니계집이라도 그 인물이 출중하면 작은집(소실, 첩)을 들이는 게 바야흐로 집안의 번성이나 명예를 높이는 일이기나 한 것처럼 첩을 들이고 그것도 부족해 아내가 시집올 때 데려온 몸종도 수시로 집적이고 행랑채 노비, 돌쇠와 삼월이 사이에 태어난 언년이가 바야흐로 열대여섯 여자 꼴이 나면 그 역시 집적대다 아이가 생기면 또 다른 하인에게 주어 내치거나 심지어 그렇게 아비가 건드린 노비를 장성한 아들형제가 그 피를 못 속이듯 또 집적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민간의 상인에게서 좀 미색이 뛰어난 딸이 태어나면 금방 관할의 수령이나 군관, 기껏 조세의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지기 창감(倉監)까지 엽전 한 꾸러미나 돈밭 대여섯 마지기를 주고 데려가고 간신히 남은 박색의 딸도 머리를 깎고 중으로 들어가 단 한 번도 따로 여인을 만나거나 성에 대한 기능점검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진2 천전리 방향에서 본 맞은 편 능산리와 향산리(왼쪽 산모롱이에 상피바위가 있음
 천전리 방향에서 본 맞은 편 능산리와 향산리(왼쪽 산모롱이에 상피바위가 있음)

그래서 스물여덟 살에 장가들 든 우리아버님만 해도 유복자로 태어나 게을러 일을 않는 장손, 형과 모친(우리 할머니)를 포함한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별 저축도 없음을 알고 근동의 어느 집안에서도 딸을 주지 않아 6척 장신에 유난히 검고 치렁치렁하게 땋은 머리를 철렁거리며(지금 살아계시면 약 120세가 됨) 가끔 동시대의 이웃처녀인 같은 마을 친구의 고모들과 무슨 쫌새(비밀한 사이 또는 사연)가 있었다는 자식으로서는 참으로 쑥스러운 이야기가 우리 외할머니 능산댁과 어머니의 외숙모인 향산댁을 통해 제가 신혼이던 시절에 들은 적이 있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그런 우리 아버지는 명촌마을의 중농으로서 다리를 약간 잘숨거리는 열여섯 살의 우리 어머니 명촌댁을 만나 저 같은 자식은 물론 무려 60명에 이르는 명촌댁 2, 3, 4대가 번성하여 언제 한번 가장 평범한 조선여인을 기리는 <명촌댁이 후손대회>를 제 생전에 <명촌별서>에서 개최, 어머니 자라난 남해마을까지 그 후손이 어머니 영정사진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계획을 제 아우와 생질, 조카사위들과 의논 중에 있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극심한 성의 불균형과 수탈 때문에 나이 쉰이 넘어도 머리를 땋고 다니며 상투 한 번 못 틀어본 머슴과 하인들이 해마다 봄이 돌아와 진달래 피고 뻐꾹새 울어 하초(下焦, 배꼽아래의 초점이라는 기막힌 신체 명)가 거북해지는 긴긴 봄날 오후에 참다 참다 못해 두 셋이 패를 지어 그 <상피바위>에 올라가 괜히 작대기로 옅은 동굴입구를 집적대기나 동굴입구에 오줌을 누고 돌아오면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상피바위가 빤히 보이는 능산이나 향산, 또 고개 너머 모단이나 옆에 붙은 산전과 도동마을, 태화강을 따라 내려간 서부리 방천묵마을까지 반드시 몇 명의 처녀나 과부, 심지어 유부녀가 바람이 나 차마 용서받지 못할 <상피>를 붙고 서까래에 목을 매고 물에 빠져죽기도 했지만 반사적으로 그 노총각들의 한 둘은 평생소원인 성희(性戲)의 기회를 갖고 더러 아내를 얻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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