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아파트(망미주공)에 아이 둘을 데리고 짐을 풀고 한 보름을 살던 며느리가 잠깐 택시를 타고 나오면 30분 내로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 성지곡어린이대공원을 구경하며 온갖 맛집을 접하고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면 광안대교가 보이는 시가 아파트에 흠뻑 빠져 자기가 살던 인도의 대저택보다 엄청난 부잣집에 시집온 것 같다며 기뻐했습니다. 원래 먹성이 좋아 아무 음식도 가리지 않는 데다 미식가 고모부가 자주 맛집에 데리고 가고 두 아이의 동년배 고종사촌 현서까지 어울려 놀 수 있는 환경, 그 편리한 아파트가 이번에 재개발을 하여 집값이 엄청 오른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우리 며느리는 살다 때를 마난 사람처럼 시가자랑이 늘어졌습니다.
그렇게 한 보름 잘 지낸 며느리가 이번엔 아이 둘을 데리고 자기 친정 서울로 가 또 한 20일 보내더니 7월 말 해수욕철이 되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어차피 빈 아파트라 오고가는 게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번엔 피서철이라 서울의 사돈내외를 모시고 왔습니다.
부산에 딸을 시집보낸 뒤 사돈집이 창을 열면 광안대교가 보이고 동양에서 제일 큰 신세계백화점과 영화의 전당까지 보인다니 무척이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한 3일, 광안리, 해운대, 태종대와 시내, 영도다리의 도개까지 구경하고 난 지난 주말 우리 부부가 부산으로 내려가 사돈 내외를 <명품물회집>에 초청, 물회와 장어구이를 대접했는데 바깥사돈이 얼마나 잘 자시던지 배탈이 나서 잘 먹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던 제가 다 흐뭇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주재원으로 간 자기 사위가 너무 똑똑하고 이번에 책을 낸 사돈이 더 훌륭하다고 노골적으로 수많은 느낌표와 감탄사를 터뜨리는 바람에 괜히 민망해서 혼이 났습니다.
그 사돈을 서울로 보내고 아이 둘과 며느리를 데리고 명촌리로 올라오는데 외손녀 현서가 저도 처음으로 엄마를 떨어져 사촌들과 같이 놀기로 했습니다.
집에 와서 마초에게 간식을 듬뿍 먹이고 꽃밭에서 사진을 찍고 가까운 계곡에 잠깐 갔다가 저녁에 거실에 모기장을 두 개 치고 이불을 까니 우리 내외는 앉을 공간도 텔레비전을 볼 처지도 안 되어 커다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하나 비워 좁은 서재로 들어왔습니다(쓰레기 통의 용도는 설명이 곤란함).
그 때부터 평소 밝고 따뜻한 곳에서 웅크리고 자기를 좋아하는 저와 시원한 곳에 온몸을 펴고 당당하게 잠들기 좋아하는 아내가 속옷차림의 만만찮은 덩치를 뽐내며 방문을 여느니 마느니, 선풍기를 켜느니 마느니 밤새 뒤척이며 싸우다
“아이들은 언제 간대?”
“부산에만 있기보단 할아버지 하고 며칠 보내는 게 효도라고 생각하니 자기들 갈 때까지 어쩔 수 없지.”
“아이구, 효성도 과분한 녀석들...”
하면서 한숨을 푸욱 쉬다 마침내 그저 꿈틀대거나 뒤집기 정도의 재주밖에 없는 통통한 우리 두 늙은이가 이리 저리 뒹굴며 잠을 못 들어 뒤채는 것이 그저 꿈틀대거나 뒤집기 정도의 재주 밖애 없는 아이들의 만화영화 <라바>에 나오는 자주색과 노란 색의 두 마리 벌레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픽 웃음이 터졌습니다.
간신히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나 대하소설 교정을 보는데 아침 잠이 없는 막내가 저를 찾아와 놀아달라고 해서 마당으로 나가가 현서와 가화, 마초까지 붙어 한 덩어리가 되더니 갑자기 간식을 준다고 한 봉지씩 들고 와 경쟁하듯 먹이니 한참 먹던 마초가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마초가 커피를 먹나 보자고 티오피커피를 열어 그릇에 담아 주니 맛있게 다 먹었습니다. 강아지 간식을 한번 사다 놓으면 한 3개월을 먹이는데 아이들이 왔다 가면 금방 다시 사러 가야하는데 그게 뭐 괴로운 일도 아니지만 반복되다 보니 즐거운 일도 못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번 피서의 하아라이트로 딸네식구들까지 와서 새로 뚫린 가지산터널을 지나 청도군 가슬갑사지 근방 계곡으로 모두 물놀이를 가고 항암약이 독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저 혼자 집에 쳐져 빈방에 누워있으니 부귀영화에 자손번영은 물론 그 많은 호사가 다 헛것이고 단지 몸 안 아프고 심관 편하게 누워 지내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만두가게를 쉬게 된 딸네식구들은 친구들과 배내골로 떠나자 아이어미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화 바라기인 서울의 왕할머니(안사돈의 모친)가 아이를 못 봐 눈이 쑥 들어갔다는 90넘은 노인의 청을 외면하지 못 해서 다시 서울로 바래주기 위해서입니다. 겉으로는 덤덤했지만 속으로 비로소 숨구멍이 틘 우리 내외는 신이 나서 아이들의 짐과 열차에서 먹을 것을 챙기고 점심은 제가 칼국수와 수제비를 먹여 오후 2시 반 차로 서울로 보내고 돌아오면서
“당신 고생했어.”
“고생했어요.”
하고 슬쩍 웃고는
“저 아이들은 앞으로 세계 어디에 나가 살아도 사철 꽃이 피고 마초가 있던 시골집, 시화가 걸리고 허수아비가 서있는 명촌별서를 기억할까?”
“기억하고말고.”
“그럼 우리가 한 고생이 헛된 것은 아니네.”
“암, 아니고말고.”
하고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언제 보아도 귀엽고 귀한 내 손주들, 그러나 좁은 방, 병든 몸으로 손주의 호사(好事), 즉 여름손님을 맞는 일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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