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21세기 토테미즘 지화마을 성황목

포토 에세이 통산 제1071호(2020.8.22)

이득수 승인 2020.08.21 16:45 | 최종 수정 2020.08.21 17:00 의견 0
 멀리서 본 서어나무 성황목과 만당정

인간의 지능과 인식이 아직 잘 개발되지 못 했던 인류의 초창기, 천둥과 벼락, 장마와 홍수, 파도와 해일, 태풍으로 늘 대자연의 공포에 떨던 원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감복하며 눞은 산, 넓은 바다, 크고 아스라한 바위나 거대한 나무, 고목(古木)이나 거목(巨木)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받들며 의지하고 살기 마련이었는데 그 자연숭배사상을 바로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이미 달을 정복하다 못해 지구와 우주와 그 모든 것이 컴퓨터로 조정되는 인공지능에 의해 마치 한 벌의 수저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활용하는 이 시절에 아직도 그 옛날 거대한 자연의 힘에 의존하며 자연을 섬기는 토테미즘을 섬기는 자가 딱 한 사람 남았으니 그가 바로 명촌리의 백두옹, 마초할배인 이 늙은이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두 번째 수술을 한 3년 전 2017년 가을로 돌아갑니다. 왼쪽 갈비뼈 3개를 절제하고 그 구멍을 고어텍스라는 등산복천으로 메꾸어 골수가 분비되어 붙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여태까지 갈비뼈를 떼고 생존한 간암환자가 한 명도 없다는 그 기막힌 생명) 제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어느 죄 많은 신처럼 날마다 가슴을 독수리에 쪼아 먹히고 다시 새살이 돋아나면 또 다시 쪼아 먹히는 그런 악순환에 빠지듯 거대한 쇠말뚝을 내 왼쪽 가슴에 박고 철렁거리는 쇠사슬로 날 옭아맨 것처럼 단 한걸음을 떼어도 진땀을 흘리던 시절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루에 백 미터도 걷고 2백 미터도 걸으며 앞서가던 마초가 늘 뒤돌아보며 기다리거나 되돌아오는 그 최악의 상태로 고래뜰과 이불뜰, 바들뜰을 조금씩 걷는데 어떤 늙은 농부가 저를 보고 딱하다는 듯 혀를 한참이나 차더니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그래도 그 살려는 마음이 대단한 것 같네요. 옛날부터 건강이 막바지에 몰린 사람은 무슨 특별한 약이나 치료보다는 그저 크고 오래된 고목나무 밑에 가서 앉아 쉬기도 하고 나무등걸을 안고 몸을 문대거나 주변을 슬슬 돌다보면 저도 몰래 몸이 조금씩 나아진다고, 늙은 부모가 자식을 해치는 일이 없듯이 늙고 큰 고목이 절대로 그 그늘에 든 사람을 해코지 하는 일이 없으니 차라리 어느 마을 당수나무나 하나 찾아서 자주 찾아가고 공을 들이면 병에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 수호신 서어나무 성황목의 모습

그래서 명촌리에서 가까운 데 어느 성황목이 가장 좋을 것이냐고 묻자 고목은 고목이지만 이제 겨우 200, 300년으로 그 수세가 한창 왕성한 지화마을의 성황당 만당정에 있는 서어나무가 수세(樹勢)도 좋지만 정자까지 잘 어울려 쉬면서 운동하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 우리 집에서 한 2킬로미터, 제 걸음으로 한시간 가까이 걸어야 갈 수 있는 만당정이라는 곳을 찾아가니 보통의 정자가 자리 잡은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그러니까 제법 큰 도랑이나 맑은 물이 흐르거나 호수나 여울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펑퍼짐한 들판의 이불마을 뒤 높이가 겨우 3, 4미터가 됨직한 언덕이 언양사람들의 산꼭대기 산만당의 역할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만당정(萬堂亭)이란 현판을 걸고 커다란 서어나무 하나와 조금 작은 포구나무 하나를 거느리고 자리를 잡았는데 정자 자체를 근래에 지은 모양으로 여기저기 날림으로 지은 조립식의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우리가 옛날 한시를 읊조리며 술이나 마시던 선비의 입장에서 본다면 높은 산, 아스라한 바위, 깊고 그윽한 계곡이나 물소리, 산새울음이든 무엇하나 정자라는 멋은 도무지 갖추지 못한 그 들판한 가운데의 엉성한 정자에 앉자 우선 동쪽의 문수산에서 동남쪽의 솥발산과 천성산과 원효산, 남서쪽의 영축산과 신불산, 칼바위가 있는 공룡능선을 정면으로 거쳐 간월산과 배내봉과 능동산, 가지산, 상운산, 쌍두봉, 운문산, 문복산, 고헌산의 1000m급 산이 10 봉우리가 거대한 병풍으로 둘러싼 상북평야의 한가운데서 동으로는 부리시봇디미와 언양읍을 거쳐 문수산과 울산에 이르는 태화강 70리가, 서쪽으로는 쌀바위가 우뚝한 가지산아래 깊고 그윽한 대현리 살티마을과 궁근정리, 남쪽으로는 칼날처럼 아스라한 신불산 공룡능선과 칼바위, 북으로는 신령스런 고헌산의 덤덤하고 당당한 품새가 조용하면서 그윽한 조화를 이루며 마치 인간의 배꼽이나 단전 같은 절대적 요처이자 혈맥같은 자리에 제가 수호신으로 삼은 서서나무와 정자가 그림처럼 자리 잡은 것이었습니다. 

만당정의 단청과 무늬

그날부터 저는 중얼중얼 나무를 경배하는 치사와 함께 박수를 치며 서어나무를 한 20회(나중에는 51회까지 횟수를 늘여) 돌며 울룩불룩 사방으로 튀어나온 동체(胴體)중 가장 작아 딱 안기에 알맞은 남쪽의 등걸하나를 껴안고 몸을 비비기도 하지만
(성황님, 저를 좀 살려주세요. 제가 아직 써야 할 글도 많지만 만약 제가 좀더 산다면 정말로 알뜰하고 착하고 보람 있게 살고 무언가 이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하고 빌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발도 벗고 양말을 벗고 정자에 드러누워 바람이 제 벗은 발가락사이로 통과하는 시원한고 통쾌함도 즐기면서 한 20분 낮잠을 즐기고 깨어나면 온 몸이 상쾌하기도 하지만 계단 바로 아래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마초도 얼마나 든든하던지...

아무튼 그렇게 저는 벌써 3년을 더 버텨왔고 그 동안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로 해양문학상을 타기도 하고 포토에세이집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가 절찬리에 출판되고 1만 쪽이 넘은 대하소설 <신불산>을 완성해 교정을 보면서 하루하루 포토에세이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21세기의 토테미즘 200년 된 서어나무의 신통력인 것만 같아 정자와 나무를 올립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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