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송도바닷가를 가장 사랑한 시인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강은교 시인이다. 1945 해방되던 해에 함남 흥원에서 태어난 그가 어떤 경로로 부산에 정착되었는지 부산의 무명시인인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명색 내가 <문화담당과장>으로 근무하는 부산 서구, 송도바다가 훤히 보이는 아파트에 오래 살며 비오는 송도바다의 우수를 가득 닮은 가장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멜랑코리한 일련의 시들 <벽속의 편지> 연작에서 책으로 낸 일에 매우 고무되었고 얼마나 도시적으로 세련된 아름다운 여성일지 늘 궁금했다.
내가 문단에 나가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던 서기 2,000년 전후에 부산문단의 중심인 중앙동, <한길(지금 강나루)>과 <계림>이라는 부산시인들을 중심으로 문인들이 모이는 술집에서 술을 먹고 문학적 담론을 나눈 뒤 이상개 시인이 하는 <빛남>이라는 출판사에서 술시를 기다리며 출출한 시장기를 달래는 고스톱 판에 임명수, 박응석, 김영준, 이상개, 김수생, 김석규 같은 선배시인들 틈에 동장이라는 직업으로 시인이 된 좀 난감한 느낌의 서정시인, 그것도 주로 연시나 쓰는 언양촌놈이 그럭저럭 관심을 받고 지낼 때였다.
대부분이 교사 같은 직업을 가진 시인들 중에서 아무런 직업이 없는 전업시인(좋게 말해서 시인이지 나쁘게 말하면 굶어죽기 딱 알맞은 게으른 문학가)는 <축일>이라는 시를 쓴 임명수 시인과 <하체의 고향>을 쓴 서규정 시인, 그리고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전업시인이자 신춘문예 출신의 정통시인으로 유일하게 중앙문단에서 알아주며 부산의 문학담당기자들이 까뿍 넘어가는 최영철 시인 정도였다. 그 중에서 희고 깨끗하며 말수가 적으면서도 뜻이 명확하고 늘 따뜻한 눈빛을 가진 임명수 시인은 돈이 없어 술값을 못내는 일만 빼면 과히 중앙동사단의 중심인물로 그가 슬쩍슬쩍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부산문단의 풍향계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어릴 적 현대문학에서나 보던 신비한 여류시인 강은교가 부산에, 그것도 내 근무지인 송도에 산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부산시인인 임명수 씨가 기억하기로 얼굴이 이국적으로 희고 밝으며 눈이 빛나는 강은교 시인은 그 신비한 외모처럼이나 이북에서 월남해 연세대를 나와 사상계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정치에 뜻을 둔 남편의 뜻에 따라 남편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사하와 가까운 송도에 정착에 여러 곳 대학의 강의에 나갔다고 했다. 그 아름답고 신비한 외모와 이력에 시집 <사랑법> 같은 조용한 허무와 고요한 우수의 멜랑콜리한 분위기에 끌린 부산의 시인들은 당시 강은교 시인이 정말 보통사람처럼 사는지, 그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도 자랑스레 생각했을 정도로 강은교 시인은 한갓 문학적 변방인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시단, 또는 여류문인의 핵심으로 주로 중앙의 매스컴에 주목 받는 대한민국의 대표시인이었다.
무명의 시골시인인 내가 그 고귀한 강은교 시인을 만난 것은 전혀 엉뚱하게도 민선시대의 구청장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민선이 시작되어 2, 3회가 지나면서 이제 민선구청장의 자질은 예산을 많이 따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고 미술관이나 민속관 같은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고 관할 주민의 복지에도 힘쓰면서 특히 향토문화의 진작과 지역예술가를 잘 보살피는 문화적 리더가 필요하다는 선풍이 일 때였다.
그래서 각 구청은 유능한 과장을 뽑아 향토의 문화재를 발굴 홍보하고 문화와 색체가 가득한 지역축제를 개발하고 미술관 조각공원, 대규모 백일장과 각종 페스티벌을 여는 것을 능사로 했는데 구 단위 축제에 길놀이를 도입한다든지 대보름달집을 백사장이 아닌 해상의 전마선에서 연다든지 향토출신 가수를 직접 초청한다든지 16개 구청 중에서 내가 가장 발군의 실력을 나타낸 것으로 시 산하 전공무원에게 소문이 났다. 내가 시인으로 부산시공무원문인회장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행정기관에 대한 비위나 불합리를 보도하는 것을 능사로 하고 긍정적인 기사를 싣기를 죽기처럼 싫어하는 부산일보, 국제신문에 부산서구청만 너무 자주 기사가 오른다고 16개 구군 문화관광과장 회의에서 온갖 볼멘소리를 다 들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그 시절엔 온갖 예술가와 문화, 공연, 전시기획가가 보따리장수처럼 16개 구청을 돌며 별 희한한 아이디어로 구청장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포장하고 구청장은 그렇게 포장되기를 좋아했다. 내가 모신 구청장은 그 문화적 호기심이나 욕심이 유독 심해 별별 예술가의 방문을 받아 조금씩 호감을 받기 위해 온갖 예술품을 사고 전시회나 공연에 대신 참석하느라고 내가 애를 먹던 시절이었는데 하루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 강은교 시인을 이야기하니 당장 만나고 싶어 했다.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면 애꿎은 아전(衙前), 문화담당과장이 자리를 내어놓아야 하는 모순 속에 나는 내가 맘속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정가를 위해 만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사슴처럼 고아한 사람이라 함부로 전화를 걸기도 말했지만 불쑥 전화를 걸고 제가 <동장시인 이득수>란 사람인데 절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너무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부산에 동장직업을 가진 서정시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유심히 시집을 읽어보니 두 번째 <꿈꾸는 율도국>과 네 번째 <비오는 날의 연가>가 너무 좋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지금 제가 감히 만나자고 할 처지는 아니나 제 상관이 원하는 만큼 점심시간을 내어주면 좋겠다고 부탁하니 흔쾌히 승낙했다. 셋이 만나 송도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아주 눈빛이 깊었다.
조용히 구청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가 송도의 멜랑콜리한 우수를 쓴 <벽속의 편지>를 이야기했고 <비오는 날의 연가>라는 내 시도 참으로 멜랑콜리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 가장 고귀하고 빛나는 영혼의 강은교라는 아름다운 시인이 있고 허무를 바탕색으로 한 그의 일련의 시 <벽속의 여자>가 송도바다의 우수를 누구보다 잘 표현한 것임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일, 나는 그 고귀한 영혼의 시인이 같은 부산에서 같은 하늘과 같은 바닷가의 물안개를 보며 동시에 우수에 젖을 수 있다는 일에 너무나 행복했다. 그녀의 시 한편을 올린다.
그 날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이
이 세상의 모든 흐린 눈들과 헤어지는 날
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
이 세상의 모든 곪는 살들과 헤어지는 날
별의 가슴이 어둠의 허리를 껴안는 날
기쁨의 손바닥이 슬픔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날
그날을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하자
그대, 아직
길 위에서 길을 버리지 못하는 이여.
- 《벽 속의 편지》 중 -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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