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 피서

포토 에세이 통산 제1068호(2020.8.19)

이득수 승인 2020.08.18 22:43 | 최종 수정 2020.08.18 23:01 의견 0
도랑바닥에 넘치는 얕은 물에 배와 가슴을 식히는 마초
도랑바닥에 넘치는 얕은 물에 배와 가슴을 식히는 마초

중학교 때 우리의 아리랑을 영어로 번역해 배운 일이 있었는데 기억을 떠올려 보면

 Arirang, Arirang Arirariyo
 We new go over Arirang hill
 If you my dear go away from me
 You will sore foot with in a mile. 

라는 영어문장을 보고 그게 평소 우리의 귀에 익고 입에 붙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가사와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그건 영어로 표기된 고개(hill)이 성황당 옆 굴밤나무에 뻐꾸기가 울고 짧은 소나기 뒤에 무지개가 걸리는 우리네 시골마을의 고개가 아니고 아파트건설 공사장의 뒤 언덕에 후문을 낸 고개처럼 너무 인공적인 느낌, 적어도 영어로 힐이라고 부르는 언덕의 개념은 차라리 어떤 장벽이나 전선의 느낌은 날지라도 애련한 우리의 민요 아리랑고개의 고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아주 소심한 복수, 복수라고 보기에도 못 미치는 우연한 발병이 나서 그렇게 주저앉아 나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참으로 소심하고 무력한 약소국의 여인, 그런 여인의 사랑과 기다림을 표현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만약 진짜 서양의 아가씨가(예를 들어 홍하의 골짜기에서 목동(牧童)을 떠나보내는 아가씨라면) 금방  

 “I Hate you, you go to hell!"
 “You shall die, i,ll kill you!”
 “난 널 저주해. 이 나쁜 녀석, 너는 금방 지옥에나 떨어져라!”
 “넌 곧 죽게 될 거야, 아니 내가 기어이 너를 죽이고 말 거야!”
 

하고 살기등등한 모든 악담을 다 퍼부을 것 같은 시원한 통쾌감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이 사람을 저주할 때 가장 강도가 약하고 소극적인 이 발병이나 나라는 말에 제가 딱 걸려들고 말았는데 독한 항암약을 먹고 발바닥과 발가락사이가 헐어 걸음을 걷기 힘들어 함부로 나다닐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간혹 내리는 비와 마른장마가 근 한 달을 질질 끌던 어느 점심때에 두 누님을 연락해 단골 <들깨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났을 때입니다. 장마중이라 모처럼 만난 형제들이 딱 칼국수 하나를 먹고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운 네 살 위 막내누님이

“참 월깨야, 그 때 우리가 코로나때문에 가려다가 못간 청도의 가지산터널 뒤쪽은 지금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예, 한 번 가보지요. 비가 많이 와서 계곡물이 기가 찰 것입니다.”

하고 새로 뚫린 <가지산터널>을 지나 좁은 계곡을 따라 한참이나 내려가 가슬갑사자리 조금 지나 도로에 차를 대고 아래쪽 민박집으로 내려가니 그 우중에서도 휴가를 낸 가족들 몇 팀이 홍수로 불어난 물에 헤엄을 치고 다이빙을 하고 한창 피서에 열을 올렸습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지팡이를 팽개치고 편안하게 누운 마초할배의 두 발
비록 물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가에 누우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특별한 준비도 없이 그냥 물가에 진을 치고 앉아 발이나 담그고 한 시간을 앉아 노는데 저는 그나마 발로 담그지 못 하고 돌아오자

“영감은 좀 불편하지만 아이들이 놀기에는 그저 그만일 것 같아.”

누굴 닮았는지 하루 종일 물에서 놀아도 지칠 줄을 모르는 물개자매 부산의 현서와 가화 우화를 이튿날 불러들이더니 세 아이들과 어머니 둘에 유일한 남자 김서방을 주장으로 삼아 금방 물놀이 팀을 구성해 음식을 갖추어 자동차에 실으며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물에 못 들어가서 어쩌지?”

아내의 말에 모두들 차마 같이 가자, 할아버지는 그만 집에서 쉬세요. 말을 못 하고 내 얼굴만 바라보는데 그래 잘 갔다와. 나는 마초와 불이서 덕고개에 있는 마초전용수영장에 갈 거야.“
하고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반바지와 런닝을 입은 헐렁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당시 발바닥의 물집이 조금 낫고 차츰 식욕이 돌아오던 저는 오후 서너 시경 햇빛이 약하고 바람이 선들선들한 들판을 마초와 둘이 걷다가 농사철에 잠깐 트렉터나 이앙기, 콤바인이 서너 번 들어가면 일 년 내내 누구도 밟지 않은 좁고 작은 농사용 다리에 앉아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편안하게 누워 휴대폰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요즘은 특히 프랑스의 여가수 에디 피아프의 샹송에 흠뻑 빠졌는데)을 들으며 내 발가락사이로 가볍게 스쳐가는 싱싱한 바람의 촉감을 즐기며 아주 잠깐 짧은 낮잠에 빠지면 나의 호위병 마초가 도로 쪽을 바라보고 앉아 내가 깨어날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밀착경호를 즐기고 기분 좋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두 누님과 아내와 함께 청도의 계곡에 가사 발로 한 번 못 씻고 바람만 조금 쐬고 오던 날의 사진
두 누님과 아내와 함께 청도의 계곡에 갔다가 발도 제대로 한 번 못씻고 바람만 조금 쐬고 온 날의 사진

마침 그날은 다른 가족들이 다 물가에 피서를 떠난 날이다 나도 나의 분신 마초에게 피서를 좀 시키려고 호주머니에 평소보다 좀 많게 무려 일곱 조각의 오리고기 간식을 넣고 옛날 명촌리에서 등억리하천마을을 향하는 덕고개(우리 또래 학생들이 길천국민학교를 등하교하던 고갯길)을 목표로 등말리 언덕을 내려가 사광리고갯길을 더듬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드넓은 고래뜰에서 아스라한 신불산 공룡능선 칼바위를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 목적지 덕고개 아래 늘 질금거리던 장맛비가 언덕길을 타고 내려 길바닥을 얕게 적시는 곳에 이르러 우선 휴대폰의 음악을 높이고 신발과 양말을 벗고 누워 호주머니의 간식을 꺼내니 기분이 좋아진 마초가 신이 나서 달려왔습니다.

마초는 닭고기 간식을, 나는 알사탕하나를 먹고 휴대폰을 넣어 다니는 조그만 가방을 베고 말갛게 씻겨 내려간 경사진 시멘트바닥에 앉자 마초도 길바닥에 한 5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넘치는 물에 앉아서 배와 가슴을 식히다 일어서서 겅중거리며 뛰기도 하면서 한동안 신나게 놀았습니다. 편안해진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싱싱한 초록색의 바람, 어느 새 잠이 든 내가 볼에 물컹한 감촉을 느끼며

“마초야, 뽀뽀는 사양이야!”
하고 눈을 뜨자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저쪽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모두 즐기는 휴가철, 행복한 소공녀 셋과 보호자 넷을 청도의 깊은 계곡으로 보내 다이빙과 물놀이를 즐기고 삼겹살을 구울 행복한 오후에 혼자 남은 이 마초할배와 유일한 추종자 마초도 그렇게 남 못잖은 행복한 물놀이를 마친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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