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아름다운 노랫말⑦ 백설희 〈봄날은 간다〉 

에세이 제1141호(2020.10.31)

이득수 승인 2020.10.30 15:29 | 최종 수정 2021.05.01 21:32 의견 0
'봄날은 간다' 이미지 [픽사베이]

봄날은 간다 /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노래 백설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1954년 발표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는 1935년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1938년 발표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과 함께 우리가요사의 대표곡이라 할 것입니다. 그 세 곡의 특징은 겉으로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빌어 속으로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서러움과 6.25의 전쟁을 겪은 참상 즉 시대상황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점입니다. 
 
앞의 두 곡이 망국의 슬픔과 반일(反日)감정을 진하게 토로하는데 비해 <봄날은 간다>는 해방 후에 발표되어 그런지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의 1,2,3 각 구절의 무대를 아주 매우 낭만적인 단어로 눈에 선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절의 상황을 대변하는 
  
  알뜰한 그 맹세
  실없는 그 기약
  얄궂은 그 노래

라는 표현으로 맹세가 알뜰해 기쁘다거나 실없는 기약이라서 서럽다거나 얄궂은 노래라 마음이 상한다는 일체의 내색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화창한 봄날 첫 구절부터 밤밤밤 가슴 벽을 울리는 전주(前奏)로 시작되는 <봄날을 간다>를 들으면 문득 온몸 가득히 어떤 기쁨이나 환희 또는 서러운 추억이 고이면서 정든 사람과 떠나온 고향이 생각날 것입니다. 

조용히 차를 마시면 투명하고 고요한 봄이 다가오고 얼큰히 술을 마신다면 백화가 난만한 찬란한 기쁨이 넘치다 문득 아득한 절망에 빠질 것 같은 저 짱짱한 하늘과 어지러운 아지랑이... 한참 더 듣고 나면 무언가 서럽고 아쉬운 마음이 그득히 고이며 저 부드러운 바람과 붉은 꽃도 이 봄날이 가면 시들고 자신도 언젠가 죽어갈 것이라는 자각을 저도 몰래 곱씹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가 발표된 1954년도의 생활상이 떠오르는가요? 6.25 참전용사나 늙은 피난민들이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쌍8년도>는 단기 4288년으로 서기로 1955년입니다. 그래서 6.25 휴전협정(1953. 7. 27)이 체결된 뒤 첫 번째 봄에 이 노래가 나왔을 때 수백만 명의 전사사와 사망자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수많은 상이용사가 목발을 짚거나 잘린 팔뚝에 갈고리를 걸고 벌겋게 취한 얼굴로 동냥을 하거나 행패를 부리던 어지러운 시기였고 무엇보다 삼시세끼 먹는 일이 가장 급박한 시절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양담배나 미군에서 흘러나온 구제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미국의 원조식량 밀가루로 국수와 수제비로 연명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난하고 어지러운 봄에도 젊은 남녀에게는 사랑이 싹트는 법, 집도 없고 직업도 없는 피난민청년들이 남루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양담배를 파는 피난지의 처녀들의 손을 잡고 용두산공원의 어둑한 꽃그늘이나 부둣가, 심지어 아미동 공동묘지와 화장장 뒷산에서 구애를 하고 사랑을 얻어 산꼭대기까지 판자로 지은 하꼬방에 아이를 낳아 키울 때 제대군인과 맘에 둔 처녀가 재회하고 홀아비와 과부가 재혼해 또 아이를 낳아 우리나라 제1차 베이비붐이 일어나던 바로 그 해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서부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벽안의 미인이 황야를 맴도는 소몰이꾼이나 총잡이, 술주정뱅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 장면을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참혹한 시대에도 지구상의 모든 여인들은 변함없이 동시대의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들 역시 자신처럼 가난하고 힘들며 서럽게 살 것을 빤히 알면서 말입니다.

이득수

그건 개인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마치 강물이 흐르거나 파도가 울부짖는 것 같은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로서 아이를 배고 낳는 것입니다. 비록 그 시대가 암울해 그 짝이 아무 쓸모도 없는 사내, 어쩌면 실없는 맹세로 경상도 아가씨의 옷고름만 풀어놓고 서울로 도망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에 나오는 무책임한 사내일지라도 말입니다.

1954년 봄이라면 알뜰한 그 맹세, 실없는 그 기약, 얄궂은 그 노래로 피난지의 처녀를 유혹하는 사내나 그걸 받아들이는 처녀 역시 그 화창한 봄이 꼭 아름답거나 즐겁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내를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이 노래는 한마디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눈부신 햇살 속에 천천히 흘러가 언젠가 자신이 늙고 죽을 그 무심한 세월을 담담히 관조(觀照)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랫말은 어느 역사교사나 가요연구가가 음미해도 참으로 훌륭한 가사가 될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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