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50)설날 스케치

말년일기 제1251호(2021.2.19)

이득수 승인 2021.02.18 22:56 | 최종 수정 2021.02.21 02:36 의견 0
혼자 육전을 시식하는 외손녀 현서
혼자 육전을 시식하는 외손녀 현서

첫 번째 사진 할아버지와 전 가족이 모인 공식 점심식사시작 전에 부산에서 언양까지 오느라 이미 배가 꺼진데다 외할머니가 올해 처음으로 시도한 육전의 맛이 궁금해 저도 모르게 시식에 여념이 없는 제 막내 외손녀 현서(9세)입니다.

한 세트로 자라는 또래 세 손녀들 중에서 저 아이가 특별히 드러난 일은 지지난해 추석엔가 제가 덕담으로

“우리 가화, 현서가 벌써 일곱 살이네. 우화는 여섯 살이나 되고. 앞으로 가화와 현서가 처녀가 되고 대학생이 되는 13년 후에 이 할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라고 운을 떼자 저도 모르게 내뱉고만 이 난감한 화두에 데해 제 사신은 물론 가족전체가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되는데

“죽. 어. 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저 아이가 내 뱉은 정답에 온 방안이 시베리아가 되고 제 딸과 사위는 한 동안 저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 아이가 벌써 세는 나이로 열 살이 되었으니 <10대(代)>가 된 셈입니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지만 저렇게 꾸준히 자라는 아이들 틈에서 저도 꾸역꾸역 잘도 버틴 셈입니다.

마침내 전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와인 한 잔씩을 따르자 기분이 좋아진 아내가

“자, 영감, 뭐 한 말씀 하소.” 하는데 건강의 정반대에선 제가 가족건강을 축원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래 오늘은 특별히 막내공주 현서가 하지.” 하는 순간 문득 숨을 멈추고 한참이나 망설이던 아이가

“올해는 우리 할아버지 더욱 건강하시고 나머지 가족들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그 새 어디서 많이 듣던 건배사지만 자기로서는 참으로 오래 고민한 고뇌의 건배사를 마치고 차례로 저와 할머니와 엄마아빠를 쳐다보는 얼굴에 아직도 긴장이 가득했습니다. 그 어린 것이 나름대로 많이 성장한 것입니다.

 딸네 가족 4명과 여섯이서 하는 점심식사
 딸네 가족 4명과 여섯이서 하는 점심식사

해마다 명절이면 우리 집에선 주로 LA갈비를 찜해서 가족과 손님이 나눠먹곤 했는데 올해는 많이 약해진 제 잇몸을 감안해 특별히 안심스테이크까지 준비해 점심상이 그득했지만 저는 이제 육 고기를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가 없어 각종나물로 밥을 비비고 스테이크와 갈비찜은 약 먹듯이 조금만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고기를 발겨먹은 갈비뼈에 조금 붙은 약간의 살점에 먹다만 고기부스러기를 보태 그 동안 꽤 오랫동안 냄새공해에 시달린 우리 마초가 맛이라도 좀 보게 안심과 LA갈비를 접시에 담은 현서가 데크로 나가 마초를 부르는데

“아무리 마초가 귀하다고 해도 일단은 짐승인데 명촌고모나 누가 보면 욕할 것 아냐?”

아내의 말에

“기독교 믿는 누님 집은 아침부터 자식들이 삼겹살이나 과일을 한 가지씩 사와 삼겹살로 설날을 때우니까 고기 걱정은 없고 단 우리가 마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인데 마초가 단순한 가축이라고 생각하면 그 비싼 살코기를 줄 수가 없지. 그러나 이 외진 골짜기의 단 3명의 가족이라면 결코 안 줄 수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나쁜 화술, 양비(兩非)론, 둘 다 나쁘지만 둘 다 무시할 수 없지 않느냐, 희대의 간신이자 흉물(凶物) 김안로(金安老)가 하던 말을 되뇌며 마초의 점심을 마쳤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LA갈비는 물론 안심까지 특식을 먹게 된 마초.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LA갈비는 물론 안심까지 특식을 먹게 된 마초.

그리고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한 가지.

작년에 제가 그렇게 비싼 약과 주사의 처방으로 한 달에 보통 3백만, 4백만 원씩 연간 한 4천만 원 이상 치료비가 들어가 멀리 열사(熱沙)의 땅에서 고생한 아들이나 종일 밀가루반죽에 묻혀 사는 사위가 다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는데 문득 거기서 반전하나가 나왔습니다. 아들의 연말정산에 의료비가 세액에서 감면되면서 환불이 엄청나 연봉이 꽤나 높은 아들이 제 누나에게 병원비 낸다고 고생했다면 500만 원을 송금해왔다니 저는 천만 원도 더 남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마음씨 착한 제 딸이 제 어머에게 다시 절반인 250만 원을 송금해 저는 아내와의 의례적 협상을 거쳐 3 : 7의 비율로 75만 원의 보너스가 생겼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제 대하소설 <신불산>의 발간에 적어도 몇 억 또는 수십 억 이상의 돈이 들 것 같아 단돈 얼마라도 제 몫으로 저축을 할 것입니다.

몸이 조금씩 나빠지면서 어쩐지 서럽다는 생각만 더 가슴이 치미는 날, 제 일흔 한 살 신축 년의 설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