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95)내 몸 속의 급진파(急進派)

말년일기 제1296호(2021.4.5)

이득수 승인 2021.04.03 15:53 | 최종 수정 2021.06.07 15:29 의견 0

내 나이 50대에 아주 귀한 손님(무엇보다 아름답고 귀티가 나는 40대 후반의 여성, 이야기의 내용상 이름을 밝힐 수 없음)을 아내의 아반떼승용차에 태우고 고속도로로 언양로 향할 때였습니다.

자동차가 노포동의 작장고개를 넘어 산과 들이 다 푸른 양산 외송리에 들어가자 내가 우리 어릴 적의 언양, 가난했지만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자 동승한 예쁜 부인도 자기 고향인 어느 도시의 뒷골목의 공중목욕탕이 있는 골목길과 철길을 넘어 시장에 갔다 오는 길의 저녁하늘에 걸리는 석양과 노을을 이야기하며 마치 여고생으로 돌아간 양 신명이 나서 아내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내가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허밍으로 <산 너머 남촌>과 <홍하의 골짜기>도 흥얼거리는데 갑자기 

“아이구, 배야!”

마치 산통(産痛)이 온 임부처럼 아랫배를 끌어안고 절절매는데

“너 출발 전에 미리 볼일 다 보고 왔다면서?”
“그렇긴 한데 모처럼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풀려 무심코 야쿠르트와 단감을 먹는 바람에...” 하는 얼굴이 아주 사색이 되었습니다.
“어쩌지...”

혼잣말을 하는 아내에게

“아이구, 내 죽는다!”

의자를 부여잡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금방이라도 분수(噴水)처럼 설사가 터질 것만 같아 눈물까지 글썽이는데

“보자아-”

비상등을 켜고 서행을 하던 아내가 스르르 노견(路肩)에 차를 세우자 <후다닥>보다는 <우당탕탕>에 가까울 정도로 마치 고속도로를 횡단하다 자동차에 부딪힌 노루처럼 그 높은 가드레일을 타 넘고 도로 옆의 산기슭에 올라가더니 조그만 소나무가 하나 서 있는 뒤 쪽에 쪼그리고 앉은 모양으로 청남색의 점퍼가 가을볕에 반짝이는데

“이용, 이용, 이용---” 어느새 고속도로 순찰차가 다가올 것만 같은 불안 속에 겨우겨우 사태가 수습되고 다시 자동차가 출발한 적이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한 과민성대장증후군(상습설사자)은 음식을 소화시키는 기능이나 대장의 수축력이 약해 함부로 설사를 하는 증세로 말하자면 그 설사의 기미가 마치 몸속에 웅크린 반란군과 같은데 그것도 아예 볼리비아의 <체 게바라>처럼 당장이라도 숙주(宿主)인 나라를 뒤집어엎을 것 같은 급진진보세력, 그 중에서 행동파라 할 것입니다. 

홍시 [픽사베이]

제가 왜 이 난감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독한 항암제를 오래 복용하던 때 제 몸속(腸)을 완전히 급진진보 세력이 장악해 수시로 총성도 요란하게 궐기하며 무능한 당국이 물러나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은데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을 먹거나 미리 음식을 가려 먹는 일뿐인데, 이제 아무 저항력도 없는 이 수구꼴통의 늙은이인 저는 그렇다고 함부로 항복(사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한 설사를 해결한 저녁 저는 어릴 적 우리 집 울타리에 열던 반질반질 한 알밤과 빨간 홍시를 생각하며 맘을 달랬습니다. 어떤 때는 정월대보름이나 2월1일 영등(永登)날 우리 어머니가 온갖 나물과 잡곡밥에 두부를 넣은 생선찌게를 올려놓고 아버지와 형님부터 우리 식구들을 차례로 거병하며 손바닥에 문종이를 태운 그 뜨거운 소지(燒紙)를 올리는 동안 오랜만에 보는 도라지나물과 김과 부부가 들어간 생선찌게가 먹고 싶어 침을 꼴깍꼴깍 살피던 일곱 살짜리 자신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제 앞길이 얼만 남지 않은 패망직전의 대통령처럼 감히 급진세력의 데모와 함성에 대적할 힘도 없는 신세지만 그럴 때마다 나 어릴 적 참으로 소박하면서 맛이 있고 모양까지 예쁜 촌 음식들을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넘겨 요즘은 한결 뱃속이 편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추신. 한 달 이상 독한 항생제를 끊은 지금 저는 손발바닥의 물집이나 어지럼증 같은 증세가 많이 사라지고 식욕이 돌아와 하루 세끼는 물론 자주 간식을 먹어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향상되어 겉만 보면 아주 멀쩡한 사람 같아 보입니다. 물론 그 지독하고 급박한 위협, 설사라는 급진세력도 기세가 끊기고.)

平里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