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6 : 봄날은 간다 - 진달래 꽃 지는 오후에
이득수
승인
2021.04.09 18:14 | 최종 수정 2021.05.01 21:24
의견
0
볕 좋은 봄날 오후에 죽은 큰누님을 생각한다. 맥없이 떨어지는 철지난 꽃잎처럼 온갖 세상풍파에 시달리던 마지막 조선의 여인, 내가 다섯 살 쯤 되던 봄 진달래꽃 흐드러진 장심백이 골짝을 넘어 두 번째 시집을 가던 노란저고리를 떠올린다.
호환보다도, 전쟁보다도 더 무섭다는 보릿고개. 가난한 우리부모는 입 하나를 줄인다고 갓 스물 철없는 누님을 홀어미 딸린 외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한 달 만에 남편이 군에 잡혀가고 또 한 달 만에 전사해버리다니. 모진 시어머니에게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고 머리채 잡히며 괄시를 받던 누님. 화가 난 우리 아버지가 시오리 나 되는 무동마을에 찾아가서 담박 손을 잡고 한달음에 태화강 건너 다시 데려온 누님. 언양 미나리 향기 좋은 봄에 진장만디로 세 살짜리 나를 업고 화전을 나가던 누님을 생각한다. 비녀처럼 꽂았던 선홍빛 참꽃도 기억한다.
그리고 몇 십 년 뒤 어머니가 앉았던 언양장터 난전을 물려받은 머리가 하얗게 센 누님을 생각한다. 장날에 일요일만 끼면 내가 오기를 기다려 <소피국물> 한 그릇에 기분이 좋아 <우리 부산동생하고 월깨>를 온 장터에 자랑하던 누님, 자형이 돌아가셨을 때 눈이 벌개서 그저 재산만 챙기던 두 전실자식과 그에 못지않던 내 생질은 15리길 무동과 20리 신평으로 두 번이나 걸어서 시집을 간 제 어미의 슬픔을 이해하려 않았다.
늙어 암에 걸려 마지막으로 형제가 만나 하룻밤을 새는 <쫑파티>에 내가 사 간 돌문어를 그렇게 잘 먹던 큰 누님은 자식들도 뜸한 텅 빈 집에서 제비꽃처럼 웅크리고 몇 년인가를 더 살았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 대문을 두드리면 목소리만 듣고 울음을 터뜨리던 누님, 수도꼭지를 닫지 않아 부엌이 한강이 되어도 모르고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같은 몰골로 마냥 눈물만 흘리던 큰 누님, 마침내 임종이 다가와 머리까지 빡빡 밀던 날 내 품에 안겨서 죽기가 싫다고, 겁이 난다고 참새처럼 바르르 떨던 누님.
그 많은 자식들 어디 두고 중국 장가계로 출장 간 내 꿈속으로 그 먼 길을 따라온 누님, 누님은 아버지의 점심을 이고 나는 막걸리주전자를 들고 논길을 걸어가다 누님이 자꾸만 물구덩이에 빠져 건져 올리다, 올리다 잠이 깨서 전화를 하니 방금 임종을 했다고 하던 누님. 세상에 그리 기댈 곳도 없었을까, 그 외롭고 무서운 길을 혼자 어떻게 떠났을까?
볕바른 양지에 앉아 누님을 생각한다. 시집갈 때 선물로 준다고 동그란 수틀에 하얀 천 걸고 빨갛고 파란 채송화 수놓던 큰누님을 생각한다. 여전히 해는 길고 배가 고픈 오후 뒤란의 분홍빛의 살구꽃이 눈물처럼 바람에 날렸고 누님은 아무것도 먹을 것을 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60년도 훨씬 더 지난 봄, 진달래꽃 머리에 꽂던 큰 누님을 생각한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