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1 : 봄날은 간다 - 풀씨꽃 당신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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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10:57 | 최종 수정 2021.05.0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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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란 시에서 죽은 아내의 무덤에 생전의 아내가 좋아하던 빵을 뿌려주자 새들이 먹어버리는 걸 한탄하던 애절한 시를 보고 도종환 시인은 꽤나 여린 사람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전교조와 시민운동을 열심히 하며 혁신적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며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다 문득 도종환 시인의 죽은 아내가 접시꽃이 아니고 풀씨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촉규화(蜀葵花, 촉나라의 아욱꽃)라 불리는 접시꽃을 제가 직접 키워보니 먼 서역에서 여기까지 진출해 살아갈 만큼 수세(樹勢)나 번식력도 엄청나고 꽃송이도 아주 크고 화려하며 당당해 그런 애련한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명촌리의 들길을 걷다 해마다 봄이 되면 논둑에 흐드러지게 피는 풀씨꽃(자운영)의 희고 붉은 꽃송이가 바람에 나부끼면서 왠지 서러운 느낌으로 다가오자 어쩜 접시꽃은 도종환, 그의 아내는 풀씨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운영(紫雲英)으로 불리는 풀씨꽃은 이름 그 자체에서 매우 아름답고 날렵하지만 붉고 흰 색 꽃잎의 배합이 너무 선연(鮮姸)해 어쩐지 서럽고 안타까운 이미지가 풍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메마른 땅에 심어도 무럭무럭 잘 자라며 번식력이 좋아 땅 심을 돋우기도 합니다. 봄에 연할 때는 나물로 먹기도 하고 꿀이 많아 수많은 꿀벌들이 하루 종일 붙어 있기도 합니다. 참으로 참하고 쓰임새가 많으면서도 착한 풀,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입니다.
저렇게 수천, 수만이 풀씨꽃이 아득히 펼쳐진 들판을 걷다 저는 은하수의 별무리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난한 이 땅에서 평생을 살다간 조선의 여인들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것은 한 평생을 가난하고 거친 농사꾼남편에 시달리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돌아서 눈물을 훔치는 현모양처, 제대로 입거나 먹지 못 하더라도 저 풀씨꽃처럼 일곱이나 아홉의 아이를 거뜬히 낳아 악착같이 키워내는 은근과 끈기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식민지의 빈농(貧農)답게 성격이 과하거나 급하고 게으르기 일쑤인 남편들에게 죽은 듯이 순종하다 그 남편이 죽으면 마치 은하수의 별을 바라보는 풀씨꽃처럼 조용조용 숨죽이며 살아가니까 말입니다.
젊어서부터 귀가 어두워 평생을 큰소리나 화 한 번 못 내고 말년에 언양장터에서 콩나물을 팔며 채머리를 쩔쩔 흔들다 돌아가신 우리 큰엄마도 그렇고, 6·25에 첫 남편을 잃고 개가해 이복자식 둘을 키워낸 우리 큰 누님도 그렇고 정신장애 남편을 만나 과수원집 섭포(곁방)살이를 하며 딸 셋과 장애인 아들 하나를 낳아 평생 고생을 하면서도 늘 풀씨꽃처럼 조그맣게 웃던 옥필이 엄마도 그렇고...
저 풀씨꽃처럼 흐드러진 조선의 여인들이, 그 한숨과 애환이 서려 이 땅이 이렇게 서럽게도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병든 남편을 떠나보낸 제 아내도 아마 그런 풀씨꽃이 되겠지요. 언덕 가득 풀씨꽃 피는 땅의 사내로 태어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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