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7 : 봄소식 - 아아, 송기챙이(소루쟁이)!

이득수 승인 2021.04.15 13:55 | 최종 수정 2021.05.01 21:18 의견 0
소루쟁이 [사진 = 이득수 ]
소루쟁이 [사진 = 이득수]

사진에 보이는 들풀이 전에 여러 번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한 ‘소루쟁이’입니다. 이른 봄 가장 먼저 산야를 새파랗게 뒤덮어 4월말 경 꽃대를 세우고 5월에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저 꽃대가 7, 8월의 한더위에 마치 불에 그슬린 듯 검붉게 시들고 9월 초 찬바람이 불면 다시 새잎이 돋아나 늦가을에 또 한 번 꽃을 피우고 새봄을 맞는 점입니다. 온대지방인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2기작 식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 소루쟁이의 이름을 재작년에 돌아가신 막내자영께서

“저 0000풀을 먹으면 입속에 ‘왜-’ 하고 불이 난다. 우리 어릴 땐 하도 먹을 것이 없어 먹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 먹지.”

했는데 그 언양사투리 0000을 제대로 듣고 기억하지 못 해 다시 자영께 물으니

“갑자기 물으니 생각이 안 나네. 일부러 생각하니 도저히 모르겠네.”

하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78세의 고령이라 긴장할수록 생각이 안 난다는 데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그해 봄 아카시아와 등나무 꽃이 한창 무르녹는 화창한 날에 늘 소박하고 건실하던 농부는 갑자기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넷 중의 마지막 남은 자영이 돌아가신 것도 슬프지만 저는 장례기간 내내 그 소루쟁이의 사투리를 떠올리지 못하고 떠난 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쓰는 언어가 가까운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카누처럼 좁은 배로 고래포획에 성공해 벌거벗고 춤을 추는 고래잡이 선장부부나 멧돼지를 잡아 울타리에 가두고 처음으로 축산을 시도하며 흘레를 붙이는 사람과 무리지어 굿을 하고 춤을 추는 군중들의 오래 묵은 함성(喊聲)이자 언어(言語)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고장 언양이 동해의 범고래와 상괭이(돌고래)가 맴도는 울산의 바다에서 영남알프스 너머 내륙으로, 또 남해의 부산포에서 한성으로 봉화(烽火)와 역마가 달리는 교통요충지, 상업거점으로 수많은 보부상과 장돌뱅이와 역졸이 살아오던 고장이라 참 특이한 역양의 사투리를 쓰고 있는데 머슴살이와 소작농, 언양 장날 난전의 장사꾼으로 살아온 저희 선친께서 농악의 상쇠와 장례식의 선소리꾼으로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읊던 그 사설(辭說)같은 반구대의 언어를 제게 오롯이 물려주신 것이라고 제가 그 반구대 암각화의 후예라고 또 한 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나 수필에 언양사투리를 여과 없이 사용하고 지금 교정 중인 대하소설 〈신불산〉을 통해서 그들의 언어와 애환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활자시대의 마지막 세대를 살아가는 언양 지방의 시인으로 제가 하지 않으면 수천 년 내려온 언양사투리, 신불산 가지산 아래 농사를 짓고 언양장터에 난전을 펴고 살던 사람들의 오랜 언어이자 풍습이며 약속인 언양사투리가 사라져버릴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자영이 잊어버린 소루쟁이 언양사투리가 마치 오랜 왕국의 궁터, ‘황성옛터’처럼 늘 아쉬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주 누님 둘과 아내와 점심을 먹고 간월사 절터에 쑥을 뜯으러 갔을 때였습니다. 모처럼 야외에 나가 기분이 좋아진 막내누님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쑥을 뜯다 문득

“아아, 송기챙이!”

하는 순간 제 귀에 감전이 되듯 고압전기가 흘렀습니다. 그게 바로 소루쟁이의 언양사투리였습니다. 우리 누님은 무엇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닌데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것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어릴 때나 새색시 때 그렇게 한두 번 들은 것 같다고만 했습니다. 어쩌면 50년을 함께 산 남편의 넋이 현신(現身)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막내자영의 2주기가 옵니다. 올해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이제 소루쟁이가 ‘송기챙이’인 것을 안 만큼 그간 쭈욱 제 마음속에 붙잡아두었던 자영을 비로소 떠나보낼 것입니다.

“자영, 이제 저 아득한 하늘을 훨훨 날아 부디 편안히 지네세요. 가끔 두 누님과 아내와 함께 ‘송기챙이’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장촌, 명촌과 언양장터를 돌아다니며 오래오래 잘 지낼 것입니다. 안녕!”

※제가 표준말 자형(姊兄)이나 매형(妹兄)을 두고 굳이 자영이란 말을 쓰는 것은 그것이 이미 수천 년 내려오며 모두에게 익숙한 언양사투리이기 때문입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里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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