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20 : 봄소식 - 등나무꽃사태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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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9 11:40 | 최종 수정 2021.05.0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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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이름의 나무나 풀 중에도 뜻밖에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등나무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노란 쑥갓 꽃도 굉장히 아름답고 칡즙이나 칡국수로 먹는 칡의 꽃도 분홍빛과 자주 빛이 잘 어울린 아름다운 꽃에 소담한 콩깍지까지 매달아 이에 속합니다. 또 열무김치나 단무지로 먹는 무도 미리 뽑지 않아 늦봄에 장다리가 나와 꽃이 피면 분홍에서 보랏빛 사이의 꽃이 아름답다 못 해 고혹적이고 하얀 참깨 꽃도 조그만 섹소폰처럼 예쁘고 청초합니다.
언양사람들의 속담에 남의 말을 잘 안 듣거나 고집이 센 사람을 등칡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등이나 칡은 다 같이 소나무든 대밭이든 무엇이든 고집스럽게 감아 올라가는 질긴 덩굴을 가져 농부들의 미움을 산 모양입니다. 그 등나무의 꽃이 사진에 보다시피 포도송이처럼 풍성하면서도 연한 보랏빛 꽃 타래(朶)가 신비하면서도 청초한 맛을 풍겨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높다란 소나무위를 감고 올라가 커다란 보랏빛 파노라마를 펼치는 경우도 있고 공원이나 유원지에 인공파고라를 만들어 줄기를 올린 경우 이맘때면 수많은 꽃송이가 아래로 드리워져 마치 수많은 영락(瓔珞)을 늘어뜨린 면류관(冕旒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 10년 전 뉴질랜드에 관광을 갔을 때였습니다. 40대 후반의 늙은 가이드가 관광안내보다는 하루 종일 건강식품과 치약판매에만 열을 올리다 표토가 얇아 쓰러진 나무가 흘러내린 지역을 지나가며
“저것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나무사태입니다. 공해에 찌든 한국에선 산사태, 눈사태만 있지만 지상천국 뉴질랜드에서는 나무 사태가 다 있습니다.”
마치 뉴질랜드사람 같은 듣기 민망한 멘트를 하자 어느 나이든 관광객이
“아니지. 한국에는 뉴질랜드 같은 심심한 나라에 없는 비상사태에 광주사태가 다 있지.” 하는 순간 저도
“무려 아롱사태까지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일 거요. 당신도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가 있는 한국인이 아닌가요?” 한 적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들을 다시 한 번 더 보세요. 또 하나의 사태, 대나무와 참나무까지 휘감고 올라가 당당히 꽃을 피운 등나무의 꽃사태입니다. 저 포도송이처럼 치렁치렁한 꽃의 비탈을 좀 보세요. 이런 나라를 어찌 뉴질랜드에 견준단 말입니까?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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