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25 : 봄날은 간다 - 늙은 동백을 위한 찬가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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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4 15:11 | 최종 수정 2021.05.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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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동백은 우리 집 현관 바로 앞에 심어진 명촌별서의 대표 정원수입니다. 나이가 근 70~80살로 추정되는 귀한 나무지만 크고 산뜻한 걸 좋아하는 도시 할매 제 아내는 대표 수(樹)로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파란 동박새가 나는 고창 선운사의 동백 숲은 물론 공원이나 교통섬의 거대한 동백나무가 이미 눈에 익었으니까요.
저 동백나무는 나라경제가 한층 발전하며 부유층이 대궐 같은 고층아파트에 입주하던 80년대 부산의 한 은행장이 40~50년쯤 된 분재를 사들인 것입니다. 그 은행장이 늙어 은퇴할 무렵 힘에 지쳐 제 지인(한 살 위지만 너무 진중해 한 번도 친구라 불러보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친구라고 지칭하겠음. 아주 가까운 사람을 지인이라 칭하는 것도 역시 예의가 아닐 것임.)에게 양도를 했답니다.
그래서 친구네 집에 왔을 때 이미 한 50~60쯤 되었을 그 분재동백은 친구네 주택에서 한 20년을 지냈는데 늙어 32층이나 되는 고층아파트로 이사, 날마다 물을 갈아주기가 힘들어 마침 전원주택을 짓던 제게 돌아온 것입니다.
저 동백이 우리 집에 처음오던 날 저는 온몸을 꽁꽁 묶은 철사 줄을 끊어 무장해제를 시키고 양지바른 자리에 심어 물을 주는데 꼬박 한 나절이 걸렸습니다. 팔다리에 해당되는 크고 작은 가지는 물론 이미 죽어 썩은 뿌리나 등걸부분도 악착같이 철사로 묶은 그 기괴(奇怪)한 모습이 왜소하긴 하지만 아직도 삿 가래를 짚고 논길에 나서는 촌로처럼 편안해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장갑을 벗었습니다.(사진 아래쪽을 보면 나이 든 뿌리 부분이 보입니다.)
처음 지치고 시들어 잎들이란 잎이 다 축 늘어진 그 동백은 명촌리의 비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누렇고 희끗희끗한 잎들이 차츰 초록으로 돌아와 연두 빛 새순을 피우는데 3년이 걸렸고 지난 해 처음으로 서너 송이 꽃을 피우더니 올해는 완전히 기력을 회복해 수십 송이의 꽃을 피우면서 새 가지도 여럿 피워 올렸습니다. 고목개화(古木開花) 심불로(心不老)라는 말처럼 여든 나이에 제2 전성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친구 간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인이 다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6·25때 부친이 전사한 그는 한 개인으로서 민족사의 아픔을 감수하는 것도 모자라 나라경제가 어렵던 IMF 때 다시 정리해고라는 직격탄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산행을 하고 몇 가지 사업도 잘 꾸렸는데 지금은 허리가 좋지 못해 집에서 쉬는데 매사 의욕이 떨어지고 우울해 보입니다.
가끔 부부동반 식사를 하면 말없이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저는 한 없이 깊고 아득한 우울의 심연(深淵)에 빠진 그를 걱정하고, 그는 불치병에 걸린 저를 염려하지만 헤어질 땐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어 서로를 격려합니다.
저 늙은 동백을 닮아 그가 어서 힘을 차리고 덩달아 저도 힘을 얻어 50대적 하산 길에서 잔을 높여 건배를 하고 왁자지껄 떠들며 놀던 날이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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