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32 봄날은 간다 - 절세미인을 다 두고서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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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4 18:26 | 최종 수정 2021.05.0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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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약한 흰 모란을 키우면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의 애절함을 절감했다는 포토에세이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집 하얀 모란이 일주일도 못 견디고 산산이 흩어져 버리던 날 장촌리 누님집에 엉개를 따러가니 붉은 모란꽃이 얼마나 풍성하고 화려하게 피어있는지 내가 왜 하필 하얀 모란을 샀을까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작년에 얻어다 심은 우리 화단의 작약이 피었는데 그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하얀 모란과 하얀 동백을 샀는지 정말 흰 꽃을 좋아하는지 생각하다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3년 전 처음 이사 와서 허전한 화단을 채우려 여러 유실수와 정원수를 사다 심을 때 장터의 묘목장수가 흰 모란, 흰 동백이 아주 희귀한 고급화초란 말을 듣고 솔깃해서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사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애를 태우는 모란은 약과, 처음부터 활착도 못하고 빌빌대던 흰동백이 지난겨울 강추위를 견대지 못해 올해는 새잎도 못 피우고 누렇게 말라가는 걸 보면서 마침내 제 식견이 모자랐다는 걸 깨달았지요. 묘목상이 희귀하다는 것은 유전자 자체가 병약한 것이고 귀하다는 것은 값이 단지 비싸다는 것인데 그걸 액면대로 믿고 달라는 돈 다 주었으니 말입니다.
중국 한나라 때 조비연(趙飛燕)이라는 황후가 있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정도로 수척했지만 황제의 총애를 독점하자 모든 후궁과 여염집의 여자들까지 황후를 닮으려 밥을 굶고 살을 빼려했던 다이어트의 효시가 있습니다만 나는 제비라는 별명을 가진 그 여윈 황후가 자녀를 낳아 행복한 태후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뭔가(夭折)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양귀비처럼 진짜 미인은 좀 풍성한 체격이라고도 하며 미인의 첫째 조건이 건강미임에도 명색 글줄이나 읽었다는 마초할배가 절세미인을 다 두고 조비연 같은 하얀 동백과 흰 모란을 샀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내 식구가 된 이상 빈사(瀕死)의 동백이나 하얀 모란, 오페라 <춘희>에 나오는 붉은 각혈(咯血) 같은 저 파리한 꽃들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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