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43 봄날은 간다 - 풋보리와 청보리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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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16:30 | 최종 수정 2021.05.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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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새파란 풋보리를 요즘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모두들 청보리라 부르고(서편제의 청산도를 비롯한 전라도의 수많은 보리밭 관광지) 시(詩)에도 다들 그렇게 써 저도 한번 써보니 영 어색했습니다. 이 경상도 보리문디가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단어이니까요.
제 기억속의 보리밭은 하얀 나비가 나풀거리는 부드러운 봄바람과 파란 보리밭을 배경으로 스멀거리던 아지랑이와 이마와 목덜미가 눈처럼 하얀 소녀의 생각과 배고픔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보릿고개란 말이 있듯이 보리를 두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두는 단연 굶주림이지요.
사진처럼 보리이삭은 폈지만 아직 물이 잡히지 않은 보리를 풋보리라 하고 저 보리이삭에 물이 잡혀 절구에 찧는 풋바심에서 우유처럼 하얀 전분이 흘러나와야만 비로소 허기를 면할 수 있어 오늘내일하던 굶주린 노인네들이 한 해를 더 산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어릴 때 길을 가다 보리이삭을 보면 습관처럼 매번 한 이삭을 따서 물을 빨아먹어보던 기억이 납니다. 굶주림이 무어 아름다울까 싶어도 의식의 맨 밑바닥에서 해마다 아련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은 어쩌면 제가 가진 가장 원초적인 재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끔 풋보리이삭을 꺾어 꽃꽂이를 하는 사람을 보면 그만 울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우리 언양지방 사투리에 ‘포시럽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복에 겨워 과분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산다.’ 라는 비꼬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먹고 살만 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먹을거리가 될 보리를 익기도 전에 잘라 꽃꽂이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포시럽다는 제 생각이 너무 촌스러운 것일까요?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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