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 26 : 봄날은 간다 - 꽃보다 신록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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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15:27 | 최종 수정 2021.05.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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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을 자세히 관찰하면 빨갛게 피어난 꽃잎이 분홍빛이 되고 다시 연분홍으로 퇴색하다 마침내 하얗게 바래어 떨어집니다. 찔레꽃이나 복사꽃 앵두꽃도 이와 비슷하고요. 그러니까 봄의 꽃들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하게 피어났다 차츰 퇴색하여 눈물처럼 서글픈 낙화(洛花)로 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성급하고 화려한 벚꽃은 팝콘이 튀듯 황급히 피다 불시에 하얀 꽃비가 되어 봄의 산하를 뒤덮는 것이지요.
그러나 잎들은 그 반대의 과정을 밟습니다. 겨울한철 작은 눈이 되어 매서운 비바람을 견딘 그 작은 생명의 설계도(設計圖)는 봄이 오면 연두 빛이나 자주 빛의 연한 눈을 내밀다 4월 말쯤이면 비로소 한층 짙은 빛깔로 햇빛에 반짝이는데 그 신록(新綠)이 오히려 꽃보다 아름다운 경우도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꽃이 지고 녹음이 우거지는 때를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라 했습니다. 푸른 나무들의 그늘과 향기로운 풀들이 꽃 필 때보다 더 좋다는 말입니다. 바로 요즘이 그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피어난 신록은 6월쯤이면 온 동산을 초록으로 뒤덮는 녹음(綠陰)이 되고 가을이 되어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어 임무를 다 하면 마치 노을처럼 화려한 단풍(丹楓)이 되고 다시 가벼운 낙엽(落葉)이 되고 정갈한 가랑잎이 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보통 꽃이나 열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나뭇잎도 나름대로 참으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얼굴과 라이프사이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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