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31 봄날은 간다 - 찔레꽃 붉게 피는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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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4 18:09 | 최종 수정 2021.05.08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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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릴 때 고향의 도랑둑에 피던 찔레꽃은 분명히 분홍보다 더 붉은 선홍으로 피어 분홍, 연분홍 순으로 퇴색하여 마지막 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아갔습니다. 예민하던 사춘기에 그렇게 흩날리는 꽃잎은 곧 눈물이 되고 그 꽃잎이 흘러가는 개울은 눈물강이 되어 찔레꽃이 질 때쯤이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뭔가 허전하고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늘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민들은 이 찔레꽃이 필 때쯤 비로소 보리이삭에 물이 잡혀(우유처럼 물고 하얀 녹말이 생겨) 아사(餓死)를 면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농민들이 가장 기다리던 꽃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형님이 사온 김동리의 『황토기』란 소설집에 마악 찔레꽃이 피기 시작하는 들판 가운데 단지 입(食口) 하나를 줄인다고 다 자라지도 못한 딸을 산 너머 마을로 그냥 보따리 하나 달랑 들려 가마도 없이 걸려서 시집보내는 아낙의 슬픈 이야기 「찔레꽃」의 연연한 슬픔의 여운은 아직도 내게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명촌리 일대엔 모조리 하얀 찔레꽃만 피고 이상하다 싶어 찾아 헤매다 간신히 이렇게 붉은 빛이 돌똥말똥한 찔레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더 살펴보고 옛날의 붉은 찔레꽃이 발견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찔레꽃이 나오는 노래로 여러분은 다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을 떠올리겠지만 너무 경쾌하게 편곡되어 관광버스에 애용되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보다 많이 늦게 나왔지만 홍민의 <고향초> 2절에 나오는 적막한 가사가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아 가사를 붙입니다.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으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데로 갔나
전해 오는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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