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24 : 봄날은 간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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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4 15:18 | 최종 수정 2021.05.0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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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0년 만에 병든 몸으로 고향을 찾은 제 형수님을 모시고 생가마을 터에 세운 망향(望鄕)비(확대해서 보면 제가 쓴 비문이 보입니다.)를 찾아갔습니다. 한때 평리부락 농악대에서 쇠를 쳤던 형수님은 객지에서 병이 들어 다시는 이 땅에 오기 힘들 것이라고 울먹여 분위기가 숙연했습니다.
버드나무가 많은 냇가 버드내란 뜻의 버든이라는 소박한 마을, 수백 년 살아온 초가마을이 고속철업무단지로 수용될 때 마을 사람들이 격렬히 반대하고 저항했지만 아무리 사유재산이라도 공익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권력에 밀려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났습니다. 떠나면서 망향비를 세우고 해마다 망향제를 지내기로 했지만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기 힘들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망향비의 앞쪽을 좀 보십시오. 30몇 층 아파트가 다섯 동이나 들어서고 있습니다. 기껏 고속철공사의 땅장사와 부동산투기를 위하여 누대로 살아온 민초들의 뿌리들이 뽑히고만 것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주절거리며 돌아서는 길에 노란 민들레는 어찌 그리도 선명한지... 봄만큼 아름다운 계절도 없지만 그만큼 무심한 계절도 없나 봅니다.
비문을 첨부합니다.
평리부락 망향비(望鄕碑)
이곳은 멀리 청동기(靑銅器)의 선대인들이 터를 잡은 ‘버든’이란 포근한 지명처럼 순하고 부지런한 이웃들이 대(代)를 이어 살아온 유서 깊은 땅이다.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처럼 길고 잘록한 50여 호의 마을은 조국발전의 대동맥인 고속도로의 개통과 더불어 상평 중평 하평의 3개 부락으로 크게 발전하더니 2012년 고속철도 업무단지로 편입되어 철거되며 부득이 주민들이 떠나게 되었지만
수구초심(首丘初心), 한갓 미물인 여우도 제 살던 곳으로 머리를 향한다는데, 우리 언젠가 다시 찾아오거나 꿈에 본다면 ‘웃각단’, ‘아랫각단’, ‘구시골’과 ‘진장만디’, ‘봉당골’의 눈에 선한 정경과 씨 뿌리고 소 먹이며 고기 잡던 ‘마구뜰’, ‘밤살매’, ‘복걸’과 ‘당수나무’, ‘용당수’가 어느 한 곳 살갑지 아니 하랴. 제 태어난 땅의 꽃향기와 바람소리 반갑지 아니하랴. 담 너머 다정한 목소리와 동사마당의 풍물소리가 그립지 아니하랴.
우리 평리 사람과 그 후손이 어느 땅에 가더라도 늘 번성하며 이 땅을 그리워하며 되돌아볼 애틋한 기원을 담아 여기 망향비를 세운다.
2013. 11. 30
평리부락 출향민(出鄕民) 일동
(글: 출향 시인 이득수)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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