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9 : 봄소식 - 박태기콩나무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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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9 11:21 | 최종 수정 2021.05.0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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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니던 중학교의 화단에서 박태기콩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무에 콩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이상했는데 생각보다 엄청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놀라다가 마침내 길쭉한 콩깍지를 오롱조롱 매다는 것을 보고 아하 콩은 콩이로구나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우리 집 우물가에 한 포기를 구해 심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삼십대 중반이 되어 아버지제사를 모시러 고향집에 갔는데 갑자기 집이 팔려 내일이면 집을 비워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영주에서 교편을 잡은 형님이 어머니를 더 이상 혼자 두게 할 수 없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형제들 몰래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이 처분된 것이었지요. 네 분의 누님이 난리가 났지만 일이 커지면 집안망신만 하다고 제가 말렸습니다.
파젯날 아침 형수가 어머니를 모시고 먼저 떠나자 우리 어머니 말로 못 가르쳐서 모조리 농사꾼에게 시집간 네 명의 누님이 쟁기와 똥장군, 거름소쿠리에 장독간의 독 하나하나에 집에서 키우던 염소와 개까지 고루고루 나누어가는 동안 부산과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저와 동생은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어 뒷짐을 지고 있다가
"그래 저 박태기콩나무를 캐서 생가의 흙과 함께 바께스에 담아가서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할 때 화단에 심으면 되겠구나."
하면서 새끼를 쳐 두 포기가 된 박태기콩나무를 동생과 하나씩 나누어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 집도 없이 남의 셋방을 전전하던 동생과 저는 그 소중한 박태기콩나무를 남의 화단 귀퉁이나 연탄창고에 처박아두다 여러 번 셋집을 옮기면서 그만 가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집을 짓고 화단을 가꾸며 제일 먼저 사다 심은 화초가 박태기콩나무입니다. 이제 환갑이 넘은 동생도 고향에 큰집이 있다는데 기뻐하며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한참씩 선연한 분홍빛 꽃송이를 바라보곤 한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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