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94) 나의 낙원 명촌리

말년일기 제1295호(2021.4.4)

이득수 승인 2021.04.02 17:06 | 최종 수정 2021.05.01 21:28 의견 0
명촌별서 뒤 칼치못둑에서 애견 마초와 산책하는 필자
명촌별서 뒤 칼치못둑에서 애견 마초와 산책하는 필자

얼마 전부터 다시 명촌리를 산책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벌보다 더 지독한 약화(藥禍)로 마치 난산에 빠진 산모처럼 온몸의 근육과 기능이 다 물러빠지고 잇몸마저 내려앉아 뭘 씹어먹을 수도 없는 처지. 그 옛날 깡촌 버든마을에서 땅바닥을 기면 닭똥을 주워 먹고 신불산 쳐다보며 자란 저는 자란 저는 그 악조건의 10군데의 통증과 부작용을 더러는 잠 재우고 더러는 달래고 더러는 진통제를 먹으며 요즘은 자고 일어나고 먹고 소화시키는 기본리듬을 잡아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며 매 순간 가장 심한 고통을 주는 환부들 달래며 마치 암과 연애라도 하는 심정으로 애지중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열일곱 살에 긴 간병 끝에 제 아버님을 보내면서 사람이 걷지 못해 종아리에 살이 빠져 출렁거리면 항우장사라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씀을 아버님으로 부터 듣고 저는 말라서 가죽만 출렁거리는 아버님의 종아리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전성시절처럼 유독 종아리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제 다리를 보고 은근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에서 수많은 농부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들의 임종을 지키고 열명길을 달래며 김해의 둘째 자영, 명촌의 셋째 자영, 장촌의 넷째 장영 같은 네명의 늙은 농부가 마침내 종아리에 살 한 점이 없는 상태로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애달픈 축문을 쓰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고향 진장을 지킨 제 4촌 막내형님도 제가 부산의 백병원에서 그 앙상한 다리를 주무르다 문득 허리를 펴고 편안하게 누워 눈을 감으며 떠나는 저승길을 혼자 배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암 발생 이후 지난 5년간 참 열심히 걸었습니다. 또 병든 늙은이가 천천히 산책을 하기로 이곳 명촌리만큼 편한 곳이 없는 것이 우선 시야만 해도 남쪽의 영축산과 시살등을 기준으로 취서산, 신불산, 간월산, 배내봉, 능동산, 가지산, 운문산, 문복산, 고헌산,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의 높고 아스라한 능선이 언제 어느 들을 걷더라도 늘 푸근한 밑그림을 펼쳐주는 것입디다.

그리고 좀더 가까이 신불산의 칼바위와 공룡능선 배내봉의 지맥 가매봉과 밝얼산과 긴등, 양등 뒷산 오두매기를 비롯해 바로 눈앞에 아스라한 봉우리 한 둘을 반드시 배치해 매일 단 한 번도 싫증을 느낄 수 없는 대자연의 위용을 느끼는데 우선 영남알프스의 대표적인 바위만 해도 영축산의 사자바위와 시살등가 채이등. 신불산 칼바위, 간월산 천길바위, 가지산 쌀바위와 귀바위에 문복산의 드린바위, 억산의 억바위까지 바위 하나의 높이가 약 100에 이르는 수직암벽을 날마다 어디에서든 하루 서너 개를 바라볼 수 있으니 제가 젊은 암벽등반가 록 크라이머라면 더 할 수 없는 행운아였겠지요.

거기다 등만리의 호젓한 논길을 벗어나면 사광리의 휘움한 고갯길, 명촌본마을의 고택과 세적비와 정려각에서 풍기는 전통의 향기, 약간은 퀴퀴하지만 뭔가 고귀한 분위기도 좋고 상북면과 언양읍의 좁은 경계 부리시봇디미로 태화강이 조심스레 흘러가는 두개의 산봉우리를 지나 언양읍의 고층아파트와 울산의 문수산의 삼각형 봉우리가 아주 편안한 풍경화 같으면서도 마지막엔 아주기하학적 초현실주의의 화면으로 다가오는 것도 참 신기한 보너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겐 단 하루도 떨어지지 않는 나의 동반자이자 분신(分身)인 마초가 있지요.

2015년 명촌별서를 짓고 친구사마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오며 저는 새끼를 안 낳은 암컷 중에서 털에 더러움을 젤 덜 타는 노란 강아지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열두 마리나 되는 마초의 12둥이 강아지 중에서 가장 눈빛이 애처로워 금방 울것만 놈을 선택했는데 그놈이 바로 마초입니다. 당시 저는 사람은 80년, 개는 한 15년을 평균수명이라고 보고 저와 마초가 한 15년을 살아 제 나이 80쯤에 늙고 병든 마초를 묻어주고 저도 떠나는 그림을 그렸는데 아니, 이 무슨 변고가 그 마초가 아직 제 돌도 되기전에 제가 병마에 사로잡혔으니 잘못하면 우리 마초는 새로 주인을 만난 뒤 단 6개월도 못 되어 낯선 새 주인을 만날 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마초와 저와 주종의 관계에 있어 생체의 리듬이 어찌 그리도 꼭 같은지, 제가 첫번째 수술을 받고 근 한달 만에 집에 오는 사이에 바야흐로 사춘기에 이른 마초는 이웃마을 발정 난 암캐를 찾아가는 열 마리도 넘은 수캐 중에 가장 어리고 작고 눈치도 없는 것이 그 큰 개들 다 무시하고 함부로 앞발 두 개 곤두세우고 덤비다 다 큰 수캐들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꼬리를 들지 못하고 뒷다리를 저는 것은 물론 눈 위에 시꺼먼 점이 두 개나 눈썹처럼 생겼는데 그게 개들도 눈썹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덩치큰 수캐들에게 하도 여러 번 물려 아물려다 다시 찢기고 아물려다 또 찢기는 수모 끝에 그 모양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슬슬 산책을 하며 천지에 가득한 봄기운을 즐기며 다시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려는 뜻이었는데 많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마초할배가 날마다 글을 쓰다쓰다 이런 날이 다 있다니, 아무튼 일생의 졸작이 될 오늘의 포토 에세이를 기념 삼아 이대로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里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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