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여행의 묘미를 아는가?
한 번 맛 본 사람은 걸리적거림 없는 혼자만의 여행을 호시탐탐 꿈꾸게 된다.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치여 더 이상은 에너지가 없다며 엄살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훌쩍 길을 나서곤 한다. 무계획이 계획인 나에게 목적지는 없다. 그저 입을 닫고 조용히 내 안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낙원이다. 그 낙원이 때로는 산이 되기도 하고, 한적한 바닷가가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 서면 나를 에워싸고 있던 모든 주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가 존재했던 공간과 시간,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법정 스님은 '여행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속 얼굴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했던가? 혼자 떠나는 여행은 내가 진행하는 집단상담의 주제처럼 말 그대로 오롯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된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온갖 바쁜 척 다하며 수선을 떨며 살아온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듯 설쳤던 많은 일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내가 가고 없어도 봄은 여전히 올 것이고 꽃들은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할 것이다.
낯선 여행길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라는 존재는 이 커다란 우주 속에서 한 나절을 살다가는 나비나 매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떠나와서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찰나를 살고 있다는 내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은 아등바등거리는 내 부질없는 욕망들에 실없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와서까지 무엇을 찾아 보겠다.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욕심도 저절로 비워진다. 그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며칠씩 잠만 자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절간에서 부처님 얼굴만 멀뚱거리며 바라보다 돌아오는 날도 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며칠을 빈둥거리다 돌아오면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건만 떠나기 전보다 훨씬 넉넉한 마음이 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있다. 언젠가 지친 일터와 일상을 떠나 터키에 간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떠나오느라 짐도 가벼웠고 아무 기대도 없으니 홀가분하게 다닐수 있었다. 터키 남자들은 길을 물어보면 그냥 손짓으로 알려주는 적이 없었다. 그 근처라면 꼭 목적지까지 모셔다 주는 지나친 친절 덕분에 불편없이 헤맬 수 있었다.
어느 날 혼자서 해지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늦여름도 지나 가을에 들어선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모래밭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했고 세상에는 나와 바다만 존재하는 듯 아득했다. 그제서야 일상을 탈출해서 아주 먼 곳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고 온전히 홀로인 듯한 자유로움에 마음은 그지없이 충만했다. 터키의 밤바다에서 여행이 안겨주는 고요한 기쁨을 완벽히 누린 순간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맑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Hi ! 하고 나를 깨웠다. 까맣게 물들어가는 밤바다 저쪽에서 하얀 얼굴의 여자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눈치코치로 알아들었지만 자신은 여행가이드를 하며 터키에 살고 있다고,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 세상을 떠도는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만족스럽단다. 그녀는 마치 오랜 이웃에게 말을 건네듯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도 있단다. 오늘이 그런 날, 부정적인 생각이 마구 일어나지만 그런 생각들이 자신의 감정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재빨리 씻어내기 위해 바다를 찾아 왔다고 했다. 심리상담사인 나보다 더 감정관리를 잘하는 그녀의 현명함이 마음을 끌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그녀의 투명함에 나도 모르게 마음의 둑들이 툭툭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어 모래사장에 던졌고 미리 입고 온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Are you happy?"라고 묻고는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I'm happy"를 외치며 차가운 밤바다를 향해 뛰어 들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저녁 바다를 흔들었고, 그 경쾌한 웃음에 뜨거운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바다로 뛰어든 그녀에게 나도 덩달아 소리쳤다. "You're swimming!, I'm dancing!"
초승달이 뜬 밤하늘에는 초저녁 별들이 하나 둘 씩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맨발의 이사도라가 되어 서늘하고 축축한 모래의 감촉을 느끼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마치 신비주의 구도자 수피가 된 듯 빙글빙글 돌고 또 돌면서 터키까지 짊어지고 온 삶의 찌꺼기들을 하나 하나 내려놓았다. 마음은 점점 환희로 가득 찼다. 어둠 속에서 파도를 가르며 수영을 하던 그녀와 모래를 밟으며 춤을 추던 우리는 오래 보아온 사람처럼 교감을 나누었고 그렇게 서로를 정화시켰다.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두 마리의 개도 소리없이 우리 곁을 맴돌았다.
그날 밤 초승달과 별과 개와 그녀와 나는 아무 경계도 없이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오늘은 터키의 그 밤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 행복하다며 자지러지게 웃던 그녀는 지금도 행복할까?
'그리운 것을 만나지 못하면 삶에 그늘이 진다'고 했던가?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나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마음이 몹시도 좌절될 때면 그날 그 터키의 밤바다를 떠올리게 된다.
가끔 삶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느껴진다면 모든 걸 접어두고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도해 보시라. 나를 옭아매는 모든 사슬들을 풀어 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춤도 못추는 몸치라면 낯선 어둠과 파도 소리에 파묻혀 꺼이꺼이 목놓아 울어봐도 좋을 일. 굳이 떠날 수 없다면 5분 명상도 나를 찾아가는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
한 철 봄날 같은 짧은 인생이다. 남 눈치보며 자신을 구속하고 닥달하지만 말고 힘들어하는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행복에 가까워진다. 부디 자신의 감정을 알아봐 주고 다독여 주는 착한 주인이 되시라.
<이은심리상담·미술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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