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상담 에세이 (6)오뎅집의 기적 - 시크릿의 비밀

이은혜 승인 2020.04.13 18:02 | 최종 수정 2020.04.14 00:09 의견 0
[사진=픽사베이]

우리 집 앞에는 작은 오뎅집이 있다. 따근한 대포와 오뎅국물이 있는 소박한 집. 그 집에 쏙 들어가 좁은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다 보면 낯선 타인이라도 결코 무심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집. 이 작은 선술집에서는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얼마나 밀접한 것인지, 그래서 사랑을 할 땐 어쨌든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진리를 절로 이해하게 된다.

제대로 술 한 잔 기울일 수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샤넬 향수 No.5 만큼 고혹적인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던 이 오뎅집이 요즘 들어 눈에 삼삼하게 가물거린다. 쉴 새 없이 떠들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갈 때면, 갈증 난 참새에게 방앗간은 차마 스쳐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 되곤 했다.

오뎅집에서 있었던 지난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 드린다. 재미를 보장하니 끝까지 읽어보시라.

강력한 카리스마의 여사장님은 조그만 공간을 꽉 채우는 유쾌한 웃음으로 지친 나그네를 맞아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팬으로 만들어버리는 주모의 능력은 나와 견줄 만하다. 오랜만에 맞수를 만나서인지 사장님에게 밀리지 않는 나의 유쾌한 본성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다 보면 어느새 웃음꽃이 피어나고 어색했던 분위기가 얼큰하게 달아오른다. 그때부터는 안면있는 이웃이나 낯선 사람들도 봄날 꽃밭처럼 어우러진다.

"어이, 아줌마! 언제 시간 날 때 나랑 노래방 함 가지." 라고 꼬리치는 칠십대 아저씨의 추파도 프로포즈처럼 달콤하다. 치마만 두르면 좋다는 남자들의 본성도 잊은 채 그저 던져주는 추파가 감지덕지해서 오늘 밤은 더 들뜨는데, 사장님은 정말 좋은 일이 있었다며 좀 들어보라고 자꾸 나를 술 깨게 한다.

어우, 눈치없는 사장님. 나는 할부지의 이야기가 더 좋은데 어느새 입담좋고 솔직한 사장님의 이야기에 빠져 들고 있다. 그저 가끔씩 들리는 손님으로 지나칠 수도 있건만 주인장은 아무런 꾸밈도 없이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그 마음에 동화되어 그만 할부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음 상한 칠십 할부지는 토라져서 집을 향하고 사장님의 인생 풀스토리가 시작된다.

육십 대 턱걸이에 들어선 사장님은 아직도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는데 그 외모와는 걸맞지 않게 갖은 고생을 다 했단다. 경제력없는 남편을 보필하느라 보험회사를 다녔단다. 월말 실적에 시달리다 신세 한탄이 나오는 날엔 지금의 오뎅집을 찾곤 했다지. 그 때마다 마음 속에서는 '내가 이 집 사장인데, 내가 하면 진짜 잘 할텐데'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사진=wikipedia/ Mori Chan / CC BY 2.0]

돈이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던 시절이라 황당한 생각에 손사래를 치면서 쓴 소주만 내리 들이켰단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뎅집 가게를 내놨다는 풍문을 듣게 됐지만 푸념만 했다고. 신기하게도 그 간절한 소망을 전해 들은 누군가가 턱하니 사장님을 믿고 돈을 빌려줬단다. 그것도 조금 모자라서 사람 피를 말리게. 그래도 어찌어찌 오뎅집을 꾸리게 된 행운의 여신은 우연하게 벌어지는 삶의 신비들이 너무 감사해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네.

그렇게 2년이 흘러 빚을 다 갚은 날의 감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환희란다. 그러니 이 소장도 힘내서 열심히 살다보면 그런 멋진 날이 올 거라며 바람빠진 풍선 몰골인 나에게 힘을 불어 준다.

아마도 타향인 부산에 와서 지쳐 보이는 내 모습이 많이 측은했나 보다. 자신의 고단하고 피로했던 삶을 꺼내 보이면서까지 나를 위로해 주고 싶은 주인장은 목소리만 씩씩할 뿐 여리고 고운 심성을 지닌 것 같다. 나랑 같은 과임에 틀림없다.

연이어 잘난 척, 척을 계속 하고 나니 결핍된 내면도 적당히 채워지고 체증도 다 내려가 버렸다.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당신도 요즘 자꾸 가라앉고 꿀꿀한가? 그렇다면 첫째, 타인의 너그러움을 믿고 둘째, 민망함을 잊고 셋째, 실컷 잘날 척해 보시기를... 삶이 한결 산뜻해 질 것이다.

낯선 곳에서 기대치 않았던 사장님의 따뜻한 성공스토리를 듣다보니 인생은 정말 살아볼만 할까? 갸우뚱 거리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감동한 것인지, 아니면 삶에 대한 나의 불신이 깊어 보이는지 사장님의 인생스토리 2탄이 이어진다. <오뎅집의 기적>이라 이름 붙일 만한 사장님의 이야기에는 한 때 붐을 일으켰던 시크릿의 원리가 그대로 녹아 있다. 그녀의 스토리를 그대로 옮겨 보면 인생은 정말 살아볼 만하단다. 나를 위해 준비된 축복들이 있다는 걸 진짜 알게 될 거라나?

미심쩍은 표정의 나에게 그녀의 감동적인 영화는 계속 상영된다. 오늘 오후 가게에 나와 이것 저것 정리를 하다 보니 검정색 비닐봉지가 다 떨어졌더란다. 비닐봉지가 필요한데 가게 문을 잠그고 사러가려니 혹 손님이라도 들까봐 망설였다지. 그런데 어디선가 씽하니 부는 바람을 타고 검은 물체들이 막 쓸려 오더라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과일 차에 매달려 있던 검은 봉지들이 S자 고리까지 달고선 자기 발 앞으로 날아 오더란다. 그것도 딱 원하던 크기의 봉지들이 한 묶음씩이나. 주인 찾아주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트럭은 뺑소니 차처럼 달아나 버리고 없는 터. 이만하면 삶은 기적의 연속이고 기막힌 세상의 조화가 아니냐고, 그러니 이 소장도 기죽지 말고 삶의 신비를 믿어보란다.

12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지금은 커다란 거실이 딸린 26평 아파트도 사고, 몇 달 전에는 사치도 하지 않고 장사하느라 술도 못 먹는 자신을 위해 외제 승용차도 선물했다며 승자의 미소를 짓는다.

시크릿의 비밀을 믿거나 말거나 사장님의 간곡한 마음은 오늘 밤 또 나를 울린다. 동생뻘 나이의 내 모습에서 과거 힘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지나치지 못하고 인생을 더 살아본 선배로서의 경험을, 절실함이 가져다 준 우연의 결과들을 어떻게든 전해주고픈 것이리라. 타인의 지친 마음을 알아보고 안타까워 하는 그 마음이 감사해서 그만 울컥해진다.

일체유심조라 했던가? 대행 스님 말씀처럼 마음은 체가 없어서 세상 어느 곳이든 들고 나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마음이 곧 에너지이고 마음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진리를 오늘은 불교의 경전이 아니라 굳건하게 삶을 버텨 온 우리 동네 오뎅집 사장님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은혜

온통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나날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의 눈을 크게 떠 보자. 시크릿의 기적은 우리 집 앞 선술집에서도, 내가 가는 해운대 좌동 시장통에서도 늘상 일어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오뎅집을 드나들며 자신의 삶을 다독이고, 한 끼의 식사가 되는 푸짐한 오뎅과 주인장의 가식없는 반김에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일상이 곧 치유로 이어지는 그녀의 삶이 아름답다.

오늘 밤은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은심리상담·미술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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