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상담 에세이 (2)상구는 예쁘다

이은혜 승인 2020.03.13 13:12 | 최종 수정 2020.03.13 13:41 의견 0

며칠 여행을 다녀온 뒤 센터에 출근해 보니 매서웠던 추위에 화분들이 거의 얼어 죽을 상을 짓고 있다. 며칠 전까지 생생하던 놈들이 잎을 축 늘어뜨린 채 힘이라곤 하나 없다. 사람도 온기도 없는 곳에서 그동안 얼마나 떨었을까? 애처로운 그 모습에 미안해져서 옷도 벗지 않은 채 햇살이 잘 드는 상담실 창 앞으로 옮겨 주었다.

화분들을 이 교실 저 교실로 막 옮기고 있는데 상구가 들어온다. 상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선생님, 이 화분 왜 다 죽어가요?”하고 묻는다. 아이의 눈에도 화분의 몰골이 말이 아닌가 보다.

난로를 켜주며 선생님은 하던 일마저 하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후 일단 화분들의 이동을 마무리 지었다. 상담실에 돌아와 보니 상구를 위해 틀어 놓은 난로가 화분을 향해 있다. 그것도 책상 위에 있던 화분이 제 옆에 있는 의자에 놓여 있다. 난로와 키가 맞지 않아 제대로 온기가 가지 않자 상구는 제일 시들거리는 화분을 제 옆 의자에 올린 후 난로의 방향을 틀어 놓았나 보다.

“선생님, 얘가 너무 추운가 봐요. 그래서 난로를 틀어 줘야겠어요. 나는 옷을 두 개나 입었잖아요.” 하고 패딩 안에 입은 조끼를 보여준다.

여리고 아픈 것을 알아보는 상구의 매구 눈에 깜짝 놀라 “상구는 얘가 아픈 것도 알아보고 마음이 참 따뜻하구나” 칭찬을 하니 “이 화분 잎을 만져보니 너무 가늘고 힘이 없잫아요. 당분간 난로를 틀어주고 따뜻한 물을 줘야겠어요 ” 하고 한 술 더 뜬다.

지적 능력은 떨어지지만 상구의 측은지심과 온유한 마음씨는 타고 난 것인가 보다. 상구는 수업을 마칠 때까지 두꺼운 옷을 입은 채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제 스스로 화분을 보살피려고 난로를 양보했으니 불평하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보인다. 대견한 아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그리 크지 않은 마당이지만 엄마가 가꾸던 화단이 있었다. 목련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주변에는 채송화 등 자잘한 꽃들이나 화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먹고 사는 일도 한 짐이건만 엄마의 화초 사랑은 유난해서 겨울이 올 때쯤이면 마당과 옥상에 비닐하우스가 만들어지곤 했다.

나무나 화분들이 얼지 않도록 헌 담요들을 덮어주기도 했고 몹시 추운 날엔 연탄난로를 피워 극진히 보살피곤 했다. 그 비닐하우스 안엔 잉꼬와 십자매 등 새들도 몇 마리 살고 있어 문을 열면 짹짹거리며 소란을 떨었다.

엄마는 어쩌다 나에게 수도를 틀어 나무에 물을 주거나 새 밥을 주라고 시켰지만 나는 그런 일들이 너무 귀찮고 싫어서 요리조리 피하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예쁜 것들이 눈에 밟히지도 않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사춘기 소녀인 내 눈에는 옆집 오빠면 모를까 새나 나무 따위들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상구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어리건만 마음씀씀이가 이렇게 다르니 성정이라는 건 이미 타고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나의 무심하고 게으른 성향이 마침내 완전히 드러나는 사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 엄마는 한 달 정도 집을 비우게 되었고 그동안 엄마의 소중한 화초들과 쫑알거리는 새들을 아버지와 나에게 신신당부하셨다. 새 모이와 물을 이틀에 한 번 챙겨주고 화분에 물을 주고 한 번씩 살펴보라는 이야기를 거듭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지만 나는 비상금으로 두둑하게 챙겨 받은 용돈이 흐뭇하고 신나서 그러겠다고 얼른 건성으로 답했다.

그렇게 엄마가 없는 며칠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비닐하우스를 드나들었지만 결국 여리고 예쁜 것에 도통 관심이 없던 아버지와 나는 서로 미루다 결국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때 까지 우리는 새들의 안녕을 걱정해 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화실에서 돌아오니 엄마는 집에 돌아와 있었고 거의 한 달 만에 만나는 막내딸이 반갑지도 않은 지 나를 보자마자 노려보면서 소리를 지르셨다.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수 있냐? 니 밥은 먹으면서 새들이 배고프고 목마를 건 생각 못 해? 에고, 징그럽고 무심한 것들 같으니. 집에 사람이 둘이나 있다면서, 에고”

어지간해선 자식들에게 독설을 퍼붓지 않는 엄마건만 무섭게 화를 내는 엄마의 태도에 나는 어리둥절해서 아버지가 또 무슨 사건을 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아버지와 나의 무심함에 비닐하우스 안의 새들이 불쌍하게도 다 죽고 만 것이다. 나는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깔의 잉꼬새는 싫어했지만 작고 귀여운 십자매들은 그래도 좋아했다. 조그만 그 새들이 배고프고 목말라서 죽었다고 생각하니 새들에게 죄책감이 들었고 엄마를 보기도 많이 민망했다.

아버지와 나는 멀뚱멀뚱 서로에게 원망스런 눈빛을 쏘아대면서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엄마는 같은 일로 반복해서 야단을 치는 적은 거의 없었지만 이 일만큼은 생각날 때마다 되풀이하곤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절대 생명 있는 것들은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었고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싫어 이 원칙을 고수하는 편이다.

세월이 가니 이런 나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꽃들이 예뻐지고 참새들의 퐁퐁거리는 귀여운 걸음에도 가던 길을 멈춰 서게 된다. 아무리 추워도 투명하게 시린 겨울을 좋아했건만 요즘은 온갖 생명들이 고개를 내미는 봄이 환희롭고 좋아진다.

이 나이가 되니 할머니가 손주를 바라보듯 사랑스럽고 애틋한 마음으로 작은 풀꽃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고 엄마의 유별난 화초 사랑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내가 결혼할 때 내 나이만큼 오래 키운 꽃나무 화분을 이삿짐에 실어 보내셨다. 며칠 뒤 짐 정리를 도와주러 온 엄마는 베란다를 둘러보며 화분부터 챙기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소중한 화분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사 통에 귀한 걸 알아본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이다.

화분이 없다는 걸 눈치조차 채지 못한 딸의 무신경을 엄마는 이번에도 몹시 서운해 하셨다.

“너 시집갈 때 주려고 애지중지 키웠는데 어째 그 귀한 게 없어진 줄도 모른담.”

엄마는 나를 나무라다 혼잣말을 하다 그렇게 애통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은혜

그 때는 화분 하나 가지고 유난스럽다고 느꼈지만 갓난 아이 돌보듯 그렇게 정성을 들인 나무를 잃어 버렸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서운했을지 이제야 짐작이 된다. 때가 되면 정성을 들인 만큼 예쁜 꽃을 피워 올리는 꽃나무는 엄마 말 안 듣고 애먹이던 막내딸보다 더 기특하고 귀여운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하고 무정했던 딸도 엄마처럼 나이가 들어가니 생명에 대한 사랑도 생겨나나 보다.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상구는 상담실을 나서면서도 시들시들 고개를 있는 대로 떨군 화분에 눈길을 준다.

“선생님, 아까보다는 조금 살아난 것 같아요. 만져 보세요. 그래도 잎이 너무 가늘어요.”하고 마음을 쓴다.

살아있는 것을 보살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랑스런 상구의 마음이 고맙다. 내 상담실에는 늘 나를 가르치는 상구가 있어 나는 조금씩 더 사람이 되어가나 보다.

<이은심리상담·미술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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