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마음을 사로잡는 남자가 생겼다.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 씀씀이도 참 괜찮은, 오랜만에 훈훈하게 가슴을 덥혀주는 사랑스런 그놈 때문에 매일 매일 웃음을 짓게 된다.
올해 아홉 살인 상구는 아직 구구단을 다 외우지 못해 버거워하는 친구지만 손재주도 좋고 눈썰미도 뛰어나 못 만드는 게 없다. 상구가 만든 악어는 아마존 늪에서 방금 생포되어 온 듯 야생미가 넘치고 상구가 즐겨 만드는 공룡들도 쥐라기 공원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하고 실감난다.
상구는 손재주만 좋은 게 아니라 구김살 없이 밝아서 구구단을 못 외우면서도 기죽는 법이 없다. 내가 칠칠은(7*7=?)하고 물어보면 "아~아 그게 뭐였더라? 또 까먹었네." 선생님이 말해 보세요."라고 환하게 웃으며 바통을 나에게 떠미는 재주도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뒤숭숭하고 덤벙대는 나는 어제도 칼에 베여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건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상담실에 들어서던 상구의 눈빛이 바로 내 손가락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 손가락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선생님, 어쩌다가 다쳤어요? 나도 전에 다친 적이 있는데 엄청 아팠어요. 많이 아프죠? 호~ 해 줄까요?"라며 감동을 준다.
상구의 따뜻한 위로에 코끝이 찡하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너무 기특해서 볼을 꼬집으며 상구도 많이 아팠을 텐데 울지 않았냐고 묻자 "안 울었어요. 울면 안돼요. 나는 남자잖아요, 남자."라고 답해 내 웃음을 자아낸다.
상구는 있는 그대로 투명하고 단순해서 늘 내 마음을 맑게 만들어주는 예쁜 친구다. 상대의 아픔을 제 것처럼 느낄 줄 알고 제 마음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아는 아름다운 친구 덕분에 나는 요즘 자주 행복해지곤 한다.
어느 날, 아이클레이 점토만 잡으면 한 시간은 거뜬히 집중하는 상구에게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꼬드겼더니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하다 너무해, 선생님은 내가 만들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이걸 못하게 하다니, 정말 너무해."하며 통곡을 했다.
그 표현이 너무 구체적이고 솔직해서 아이의 울음 앞에 나는 그만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저도 덩달아 울다 웃는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한 나 전달법, 의사소통법을 그렇게 강의해 왔건만 상구에게는 늘 전패하고 만다. 사람과의 소통에 있어 솔직함과 따뜻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상구를 통해 배우게 된다. 또한 사람이 가진 기운과 파장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상구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행복해지려면 행복한 사람 옆에 있어야 함을, 내가 행복해야 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멋진 남자 상구. '나는 남자잖아요, 남자'라며 어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던 상구처럼, 타인의 아픈 손가락을 제 손가락처럼 호해주던 상구처럼 세상 남자들이 다 이렇게 솔직하고 따뜻해진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재밌다.
나는 가끔 상담 장면에서 여자보다는 남자 편을 들어 내담자들의 반감을 사곤 한다.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이겠지만 감정 표현에 미숙하고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수컷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크기 때문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조차 못하는 불쌍한 남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유야 어디서 비롯되었든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이 아프다. 힘든 세상이라지만 적어도 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라캉의 말처럼 내 욕망을 양보하지 않고 충실할 수 있다면 타인의 욕망도 보다 잘 살필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렇게 사람 냄새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제 상구가 저 문을 밀고 들어설 것이다.
나는 또 웃음과 행복감에 빠질 시간... 오늘 아침 내가 좋아하는 사람 희경으로부터 선물받은 메르세데즈 소사의 노래 제목처럼 '삶이여!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상구야 고마워~너 땜에 자꾸 세상이 예뻐보이니 이를 어쩐담!
<이은심리상담·미술치료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