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소년원 남학생들에게 예비부모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경남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찾아가는 예비부모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 취지가 마음에 와닿아 시간이 나는대로 마음을 보태고 싶어 참여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와 내용으로 접근해야 할지 막막해 하다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았어요. 딸일까? 아들일까?"
다소 엉뚱한 시작에 딴 짓을 하던 아이들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는 듯 멀뚱하니 나를 쳐다본다.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결혼 안 할건데요? 아이를 왜 낳아요? 나 같은 꼴통 나오면 어쩌려구요?"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꼴통이라고 이리저리 쥐어박히며 낙인찍혀 왔으니 자연스레 나오는 반응이겠지만 스스로를 아무렇지 않게 꼴통으로 치부해버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냐며, 있으면 사진 한번 보여달라는 관심을 보이자 아이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떨떠름하던 분위가 조금 밝아지고 왁자지껄 소란함 속에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를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이게 왠 걸? 자식을 낳지 않겠다던 말과는 달리 아이들은 제법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세 명에서 네 명까지 도화지가 비좁을 정도로 꽉 채운 그림을 보며 이렇게 많이 낳을 거냐고 묻자 "사람이 재산이잖아요" "아이들이 많으면 그 중에서 한 놈은 돈도 잘 벌고 효도할 거 아니예요" "외롭지 않고 좋잖아요" 등 아이들의 대답은 제각기 다르지만 살아온 환경과 욕구가 묻어난다.
강보에 쌓인 갓난 아기부터 키 순으로 네 명의 아이를 그린 재원이는 아이의 이름을 이력, 정력, 지력, 차력이라 소개했고 정력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책상을 치며 깔깔거린다.
재원이는 세상을 사는 데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첫째 아이는 힘 력(力 )자를 써서 이력이고, 둘째 정력이는 바른(正) 힘이, 셋째는 인생을 잘 살아가려면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智)력이, 넷째는 차력사가 되라는 게 아니라 음은 약간 다르지만 착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차력이라고 지었다며 유머스럽고 멋지게 이름의 의미를 설명했다.
재원이의 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부당한 대우나 편견에 많이 시달렸을 아이의 씁쓸한 상황이 그려진다. 이 소년인들 착한 아이로 인정받고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을꼬? 반항과 깡으로 버텨오면서도 바르고 지혜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게 참 고맙고도 짠하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로저스의 관점처럼 인간은 본래로 자기실현 경향성을 가진다는 것을 재원이를 보며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예비부모교육 내내 재치도 있고 문학적인 감수성도 뛰어나 나를 즐겁게 해준 다운이는 네 명의 아이 이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소개했다. 이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어떤 유산을 물려주고 싶냐고 물었더니 다운이는 역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그 빛나는 감수성을 발휘한다.
첫째 딸 봄이에게는 꽃의 향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들 여름이에게는 태양의 뜨거움과 열정을, 그리고 가을이에게는 시와 낙엽과 노래를, 막내 겨울이에게는 하얀 눈의 맑음과 깨끗함을 주고 싶단다. 눈사람을 만들 때 필요한 벙어리 장갑과 함께.
아이들은 우우~소리를 지르며 재수없다고 놀리면서도 다운이의 감성적인 표현에 놀라는 눈치이다. 나도 재원이와 다운이의 이야기에 내심 감동했고 엄청 반갑고 기특해서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렇게 예쁜 생각을 가진 아이들인데 눈빛에는 벌써 불신과 무기력감이 어려 있다니 또 짠해진다. 여기까지 올 때에는 분명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들이 있었을 테고 방황할 때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어른 하나 없었을 것이다.
위기청소년들을 상담하면서 성매매로 두 번이나 소년원을 다녀온 소녀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샘, 사실은요. 날 좀 가만 내버려두라고 하면서도 제발 관심 좀 가져주길 바라는 두 마음이 늘 갈등을 일으켜서 참 힘들었어요. 성매매 사실을 숨길 수도 있었지만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엄마 아빠가 원망스러워 내 스스로 경찰에게 잡힌 적도 있어요.”라며 울먹이는 정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만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부모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고 어떤 유산을 받고 싶냐는 물음에서도 아이들의 생각은 또 나를 울렸다. 여느 아이들처럼 대부분의 소년들이 '너를 믿는단다' '괞찮아 괜찮아' '사랑한다 우리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받고 싶은 유산에서는 아이들답게 '오토바이' '저택' 등의 대답도 있었지만 '사랑'과 '신뢰'라는 진지한 답변도 있었다.
소년원에 입소하기까지 대부분 무관심과 비난 속에 상처 받으며 자주 절망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덩치만 컸지 여전히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영락없이 겁많고 어린 소년들이었다.
곧게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도 실은 뒤틀리며 자란다고 한다. 대나무도 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디맺음을 하며 자라듯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힘든 성장통을 겪으며 살아내고 있나 보다.
최근의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청소년의 뇌는 아직도 변화가 많은 상태에 있어서 늘 뒤죽박죽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그러니 문제아라고, 안 될 놈이라고 낙인찍지 말라. 아이들 안에 내재된 본래의 선한 힘과 존엄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버텨주는 어른들의 인내가 있다면 모든 소년들은 멋진 남자, 제 몫을 다할 줄 아는 선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온 마을이 아이 한 명을 키운다는 마음으로 긍정과 사랑, 지지와 연민의 언어로 어루만져 준다면 척박한 환경에서 강팍해진 아이들도 재원이와 다운이처럼 유연하고 따뜻한 소년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은 본래로 선한 존재이므로.
<이은심리상담·미술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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