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훌쩍 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어떤 아이들은 보석같이 반짝거리며 감동도 주었고, 어떤 아이들은 가슴에 상처를 남기며 많은 고민과 과제를 남기기도 했다. 이런 제자들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이제는 들려주고 나누고 싶다. 어떤 아이들이 교사의 눈에 들어오고, 가슴에 남아 메아리가 되었을까.
* 내 삶 속으로 들어와 내 안에 빛나고 있는 제자, 첫 번째 이야기
2005년 뜻이 맞는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일과 후 학교 도서실에 모여 독서토론을 하거나 주제를 정해 공부하는 모임을 가졌었다. 그 날이 오면 선생님들은 열일을 제쳐두고 모여서 토론하고 수다도 떨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첫 제자 경호로부터 영상 선물을 하나 받았는데, 공식 모임 후 학습 동아리 선생님들과 도란도란 앉아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듯 선물 받은 영상을 보게 되었다.
선물 받기 한 달 정도 전에 경호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앨범 사진을 보다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사진 좀 갖고 갔다가 돌려드려도 될까요?”
“왜? 뭐하게?”
“제가 요즘 영상에 관심이 많아 기술을 좀 익혔는데 한 번 만들어 보려고요.”
그러더니 50장의 내 사진은 영상이 담긴 CD로 돌아왔다. 영상에는 초임 교사시절부터 결혼, 임신, 육아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역사가 소소하게 담겨 있었다.
마지막 슬라이드에는 “귀한 사진에 서툰 편집이지만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쉽지 않은 세월 동안 선생님과 함께여서 행복했고 존재로 항상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글이 음악과 함께 자막으로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흘렀고, 함께 보던 선생님들도 자신의 일처럼 공감해 주었다. 경호는 우리 모두에게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선물해준 것이다.
경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부곡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은 시절 만난 제자다. 북한이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중2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질풍노도의 한복판을 지나는 남자중학교 2학년이었던 경호는, 덩치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주먹도 센 아이여서 본인은 이미 다 컸다고 생각하고 다소 냉소적이고 반항적이기도 했다. 수업 중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책상을 치며 큰소리로 웃을 때도 유치하다는 듯 맨 뒤에 비스듬히 앉아 ‘난 너희들 철없는 놈들과는 난 달라.’ 이런 표정을 짓는 아이였다.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이 되어서도 경호는 잊지 않고 찾아오길래 학교 다닐 때는 별 표현도 없더니 어떻게 이렇게 찾아오냐는 나의 질문에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저는 선생님이 진짜 좋았어요. 모르셨죠?” “진짜? 왜?” “사실 군대 같았던 중학교 시절 선생님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 같았지요. 그 별난 중학교 남학생들에게도 인격을 존중해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따뜻하게 손 내밀어 주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감동받았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다보면 그 당시에 표현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이렇게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아도 가슴 속으로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서둘러 해병대를 자원한 경호에게 “왜 남들은 힘들다고 피하는 해병대에 그것도 서둘러 자원을 했어?” 물으니, “알고 보면 우리 아버지가 힘깨나 쓰는 분이거던요. 혹시라도 어디 말해서 좋은 데로 빼 줄까봐 걱정이 되어서요. 그러면 사내자식이 쪽팔린다 아입니까.”란다.
그 말을 듣고 참 대견하고 든든했다. 경호에게 해병대 667기를 어찌나 자주 들었던지 외울 정도이다. 한 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해병대로 월남 다녀온 이야기를 어찌나 자랑스럽게 말씀하셔서 “몇 기이신가요?” 물었더니 그 분이 “아이쿠 어찌 기수를 압니까?” “후후 네, 우리 제자가 667기라서요.” “이야 훌륭한 제자를 두셨습니다. 오늘 차비는 마 됐습니데이.” 대한민국 해병대 전우애는 예나 지금이나 굉장하다.
태어나서 자라고 바다가 있는 부산이 좋다고 졸업 후 부산으로 돌아와 취업한 경호는 친구들과 술을 한 잔하는 날이면 간간이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면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합니까.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했습니다.” 교사가 아니면 두 아이의 엄마인 아줌마가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스승의 날이나 간간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경호와 제자들이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오랜 세월 기억해 주고 찾아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 라고 하면 “아닙니다. 찾아오고 싶은 선생님이 있어서 우리가 고맙지요. 친구들 보면 스승의 날이 되어도 찾아갈 선생님이 없답니다. 이런 선생님이 계시니 우리가 복 받은 놈들이지요.” 란다.
경호는 시간이 지나도 여여(如如)해서 좋다. 낭만적이며 느긋한 성격이라 만나면 참 편안하다. 안목도 남달라서 그에게 추천을 받아서 본 영화는 실패가 없다.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경호를 통해 알게 된 노래나 가수들도 꽤 많다. 낭만 가객 같다. 같이 늙어간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남편과 갈등이 있거나 직장 생활 속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선생님 남자들은 말입니다......” 라거나 “좋은 일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지요.”하면서 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산 사람 같이 말하며 위로가 된다.
경호 말처럼 진짜 같이 늙어가나? 좀 의외인 것은 젊은 날에는 정치에도 세상사에도 너무 냉소적이고 관심이 없어 젊은 애가 왜 그리 느긋하고 야망이 없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되려 중년의 나이에 정치나 세상사에 분노하고 비판이 늘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순수하고 젊다는 증거일지도.
교직에 있다 보면 화를 내고 삐딱하게 굴고 흥분하는 아이가 차라리 낫다. 열정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기에 들어주고 인정해 주며 토론하다 보면 실마리도 찾고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수업이나 학교생활에 무기력한 아이를 일깨우는 게 정말 힘든데, 이는 많은 교사들의 고민이고 숙제다.
◇ 이미선 소장은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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