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노래 소리.....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미미한 것, 가벼운 것, 한 줄기 시원한 비, 순간의 뭉클한 감동, 설레는 눈빛 등.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시작하는 한 걸음이 중요하다.
어릴 때 내 꿈은 좋은 선생님
선비처럼 꼿꼿하셨지만 생활력은 영 아니었던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의 진로·진학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반면 생활력 강하고 자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특별했던 어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시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7남매를 공부시키고 헌신적으로 지원하셨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어머니의 정성과 헌신 덕분임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알고 감사하며 산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하든 부자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차별 없이 손잡아 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위기를 맞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회비도 제때 낼 수 없던 집안 형편을 뻔히 아는 나는 인문계를 진학해도 될지 고민이 많았다. 이 고민을 들으신 어머니는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집안 형편이 괜찮았는데도 너거 외할아버지가 학교를 안 보내줘서 못 배운 설움이 너무 크다. 허리가 꺼꾸러져도 나는 자식들 공부 하나는 꼭 시킬란다.” 고 하셔서 그 말씀에 힘입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추첨을 통해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카톨릭 계통의 학교라 운동장 한복판에도, 교실 안에도 성모마리아상이 있는 데다가 조·종례 시간에는 기도를 하고, 종교 시간도 있고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수녀님 신부님들이 몇 분 계셨다. 처음에는 이 환경이 무척 낯설고 어색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교정은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한 장미로 반짝이기 시작했고 학교생활도 적응이 되어 깔깔거리며 즐거운 여고 시절이 이어졌다.
내게 대학과 학과 선택의 결정적 영향은 고등학교 2학년 윤리시간이었다. 그때는 여고에도 교련 시간이 있고 군대처럼 사열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윤리 수업을 담당하셨던 신부님은 유신독재 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교과서는 아예 덮어두고 생활 속의 문제를 주제로 삼아 토론하는 등 현실과 생생하게 교감하는 수업을 하셨다. 또 ‘천국의 열쇠’ ‘진흙탕에서’와 같은 책을 선정해서 한 달간 읽고 토론하는 등 아주 특별한 수업을 받으면서, 난 처음으로 현실을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동안 절대적이라 믿었던 교과서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내가 윤리 교사가 된 것은 그 신부님의 영향이 매우 컸다. 나는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교사가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논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학과 선택으로 이어졌다.
꿈꾸던 국립 사범대학을 들어가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1학년 들어가자마자 5·18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고 봄빛 가득했던 교정은 문이 굳게 닫히고 운동장은 온통 군인들이 점거해 들어갈 수 없는 학교가 되어 휴교에 들어가면서 시대를 고민하고 정신적 방황의 시절을 겪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나는 2년 정도 수업보다 다양한 철학, 사회문제 관련 책을 읽으며 삶은 무엇인지, 정의는 있는 건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시절 우연히 들린 작은 암자에 적힌 문구 “빛을 찾으러 다니지 마라. 너 자신이 빛이 되어라.”라는 글을 보고 문득 깨달음이 있어 하산(?)하게 되었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있는 곳에서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음을 깨닫게 한 그 일은, 이후 교단에서도 아이들과 인간 본성과 삶의 본질을 고민하고 이야기 나누게 한 귀한 경험이 되었다.
우리 시대는 임용 세대가 아니어서 국립사범대학만 졸업하면 당연히 교사가 되던 시절이었기에 4학년이 되면서 배부른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나 역시 우연히 방송 리포터 활동을 한 경험으로 방송국 아나운서가 될까, 큰오빠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까, 대학원에 진학할까 등을 놓고 이런저런 고민도 했다. 그 고민에 대한 명쾌한 답은 영화를 보러 가서였다. 그 당시에는 본 영화 시작 전 국가에서 만든 홍보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그 날 잠시 보여준 어느 섬마을 여교사의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맑디맑은 아이들과 삶을 이야기하는 교사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부름’(calling)이었다. 그 영상은 평생 이 땅의 교사로 서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이 진로상담을 해오면 나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생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라.”고 강조하는데, 나는 그 세 가지를 충족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여 살아왔으니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다. 안도현님의 시처럼 이 세상에 아이들이 없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를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이미선 소장은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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