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엄마, 옆 집 형아가 갖고 있는 자동차 나도 사주세요.” “싫어요, 안 할래요.”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어린 시절 종일 따라다니며 칭얼대다 잠든 아이의 볼에 내 볼을 대고 있으면, 쌔근쌔근 숨소리가 가슴으로 전해지며 하루의 피곤이 다 풀리고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하게 되었다. 커서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위로도 되어주어 준 것보다 받는 게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를 하면 할수록 깨닫게 된 사실 하나. 선생님 역시 학생들에게 순전히 에너지를 빼앗기는 게 아니라는 것.
“선생님, 오늘은 비도 오는데 수업하지 말고 귀신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도 옆 반처럼 종례하지 말고 집에 가요.” 어찌 그리 에너지도 많은지 뛰고 다투고 말도 많은데 정작 멍석을 깔아주면 딴청 피우던 아이들. 근데 아이들이 막상 집으로 돌아가 텅 빈 교실과 운동장을 보고 있으면, 성가시게 굴던 아이들도, 짜증나게 했던 아이들도, 볼이 미어지라 먹어대던 아이들도,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던 아이들도 하나, 둘 떠올라 혼자 살며시 미소 짓거나 따뜻해지는 날이 더 많았음을 기억한다.
* 제자가 응답하다. “소중한 도덕 수업”
해마다 스승의 날이 오면, 잊지 않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해서 안부를 묻거나 메일을 보내고 간혹 꽃바구니를 보내오는 제자들이 있어 참으로 감사하게 된다. 이번 스승의 날에 보내온 제자의 편지 소개로 이야기를 대신한다.
이미선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3학년 시절 도덕선생님이셨다. 되돌아보면, 여중생이었던 우리들은 참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바람직하게 학교생활에 임했었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시험인 ‘고입선발고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요즘의 ‘멘토-멘티’처럼 친구들이 서로 도와가면서 부족한 학습을 보완했었고, 야간자습시간이 없었지만 자율적으로 방과후에 한 두 시간 각자 교실에서 조용히 자습했었다. 점심시간에 자율적으로 과목별로 예상문제나 내용 요약을 우리들끼리 공유하면서 함께 공부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떤 보상이나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했던 자발적인 일상의 학교생활이었다.
매사 성실하고 진지하게 우리는 함께 노력하면서 성장했었다. 마룻바닥인 교실, 복도바닥을 깨끗이 청소하고 헝겊으로 ‘광’을 내면서도 같이 즐겁게 청소하면서 서로 깔깔.. 하하.. 호호 재미나게 함께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었다. 이렇게 하면 마룻바닥이 더 반짝반짝해진다며 서로 요령을 전수해주던 그때 여중생들은, 요즘의 분위기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것 또한 재미있게 함께하면서 즐겁게 학교에서 생활하며 성장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는 학교 수업을 참 중요하게 여기고 선생님의 말씀들을 새겨들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배웠던 것 같다. 그중에 도덕 시간은 특별히 더 기다려지는 수업시간이었다.
도덕 선생님이셨던 이미선 선생님께서는 교과서 없이 맨손으로 수업에 오셨다. 항상 활짝 웃는 얼굴에 경쾌한 목소리로 “안녕!”하며 들어오셔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셨다. 거의 성대모사 수준의 다양한 표정과 목소리로 역사의 어느 한 장면, 사건들을 서사로 엮어 풀어주셨다. 때로는 선생님의 경험담, 주변 삶의 이야기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반은 참 재미나게 깔깔... 낄낄... 엄청 웃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책상을 치고 손뼉을 치며 재미있게 이야기에 빠져서 웃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즈음, 교과서 어디를 펴게 하시고 내용을 정리해주셨다. 그래서 그 날 배운 내용을 다시 복습할 때면, 수업시간에 들었던 이야기와 웃음들이 그대로 떠오르면서 쉽게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
참 신통방통했다. 교과서, 분필 하나 없이 환하게 웃으며 교실에 들어오셔서는 재미나게 한바탕 이야기를 해주시는 데 알고보면 그것들이 다 교과서 내용이었다.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한바탕 웃고나면 뭔가 모르게 후련한 느낌으로 마음이 밝게 가벼워졌고 힘이 났다. 지나고 나서 수업내용을 복습할 때도 수업 중간중간 웃었던 기억이 떠올라 웃으면서 도덕 시험공부를 했었다. 그때 수업내용이 일상의 삶과 연계되어 재미를 느끼는 순간순간을 누렸던 도덕수업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나도 저렇게 재미있는 수업으로 활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이후 고등학교 진학하고 교사의 꿈을 가질 때도, 교원대에 가서 수많은 수업실습을 연습할 때도, 교과서없이 재미있게 이야기로 풀어가는 그 때 도덕수업을 늘 염두에 두었었다.
수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내가 하루에 서너시간의 국어수업을 준비하면서도, 항상 최우선의 목표는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고 재미있게 웃으면서 수업을 듣고, 나중에 아하! 하며 수업내용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알찬 국어 수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중생시절 나에게 웃음과 활력을 북돋아주었던 도덕 수업은, 교직경력 20여 년이 흐른 요즘도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수업을 설계하고 준비할 때 늘 염두에 두는 수업모델이다.
교사와 학생으로 만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예진이, 중학생 시절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공부했던 모범생 예진이는 이제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되어, 같이 교육을 고민하고 서로 격려하는 교육동지가 되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깨우쳐 주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손잡고 이 길을 걸을 수 있어 참 좋다.
◇ 이미선 소장은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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