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을 맞아 생각한다, 내 인생 선생님들을.
특별하지도 이쁘지도 별 눈에 띄지도 않았던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지지해 주셔서 오늘을 있게 한 나의 선생님들.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만났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이 자리까지 온 것은 그분들의 정성과 사랑 덕분이었음을 나는 안다.
◇ 스승의 날을 맞아 - 다섯 분의 내 인생 선생님들 이야기
▶수많은 대중 앞에 서도 주눅 들지 않는 힘을 키워주신 옥영호 선생님
초등학교 4학년 국어 시간, 내 차례가 되어 소리 내어 책을 읽는데 갑자기 담임선생님이셨던 옥영호 선생님께서 "잠깐!" 이러시더니 칠판에 문구를 적어주시며 따라 해보라고 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문구는 “ 푸르게 짙어가는 6월이 오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생각합니다.” 웅변 원고였다. 선생님의 억양을 흉내 내어 따라 했더니 “됐다. 니가 우리 반 대표로 웅변대회 나가자.”
웅변학원 한 번 다닌 적 없던 나를 매일 방과 후에 남겨 연습을 시키시며 “목소리 좋아. 더 자신있게! 됐어, 바로 그거야.” 격려하고 용기를 주신 선생님 덕분에, 6월 땡볕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을 앞에 두고도 겁 없이 외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이후 전국 웅변대회, 영어 말하기 대회나 연극 등은 물론이고 교사로 서는 일, 2000여 명의 전국 진로 교사 앞에서 강의하는 일, 큰 행사에 사회를 보는 일, 전국 장학사 대표가 되어 대통령 앞에서 토론하는 것 등도 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싫어했던 생물 과목을 좋아하게 만들어준 준 최태진 선생님
중학생 때 기초조사를 했는데 그 항목 중에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과목, 싫어하는 과목을 적는 칸이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생물이었다. 생물 담당이었던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나를 불러 생물이 왜 싫으냐고 하시면서, 이번 가을에 있을 과학전시회는 선생님과 공동으로 개구리를 연구하여 나가자고 하셨다. 그 해 여름방학은 날마다 개울가에 가서 개구리를 잡고 매일 관찰일지를 쓰며 보냈다. 선생님 지도를 받아 대회에 출전해 작은 상도 받았다. 물론 나의 능력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그토록 싫어했던 생물 과목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덩달아 과학 성적도 오르게 되었다. 선생님의 관심과 격려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다.
▶예술의 세계에 눈뜨게 해준 남정호 선생님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를 일깨우고 성장시킨 선생님들을 특히 많이 만났다. 내 학과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요한 신부님은 지난번에 소개해 생략한다. 작가이자 시인이셨던 조동숙 국어 선생님을 좋아해 문예반에 들어가 시도 쓰고 백일장에도 나가 상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이 지금도 책을 좋아하고 매달 독서 모임을 하는 삶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고2 무용 시간, 매력적이며 당당한 모습의 남정호 선생님을 만났는데 첫 시간부터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선생님이었다. 그분의 첫 수업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맨발의 이사도라 던컨의 생애를 어찌나 맛깔나고 실감나게 들려주시던지 우리는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몰입했다.
선생님은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며 무용 수업을 이끄셨는데, 문외한이었던 나를 예술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신 덕분에, 직접 무대에 서지는 못해도 연극이나 공연 등을 보고 즐길 줄 아는 삶이 되게 해 주셨다.
▶먼저 손잡아 주고 안아주는 교사로 서게 해준 최중옥 교수님
대학 생활 역시 내 삶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여러분의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한 분을 꼽으라면 최중옥 교수님이다. 최 교수님은 처음 보기에는 외모도 출중한 데다 세련되고 말솜씨도 수려해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는데, 막상 수업을 시작하니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들려주시며 수업 사례로 풀어내셔서 큰 언니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방학 때 선생님께 안부 편지를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 4학년 때 교수님 연구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부지런했던 나는 매일 교수님이 출근하기 전에 먼저 가서 청소하고 찻물을 끓여두고 기다리면,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큰 소리로 “Good morning?” 하며 환한 웃음으로 안아주셨다. 교수님과 나는 도시락을 싸 와서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점심시간의 즐거움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교수님은 베풀기를 좋아해서 과일이나 맛난 음식들도 자주 사 주셨고, 지나가다 예쁜 옷을 발견하면 내 것까지도 여러 번 사 주셨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어서 교수님과 같이 있으면 따뜻하고 행복했다. 그런 교수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생활했기에, 아이들에게 먼저 손 내밀고 안아주는 교사로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전문성과 창의, 여유와 낭만으로 인생을 열어준 서민원 교수님
난 아이들을 다 키우고 중년의 늦은 나이에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매주 두 번씩 저녁 시간에 공부를 하러 다니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새로운 배움으로 설레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는 지도교수인 서민원 교수님의 영향이 매우 컸다. 교수님은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밴 분이셨고 여유와 낭만이 넘치는 분이셨다. 수업 방식이나 일정도 학생들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하셨고, 전문성이 있으면서도 창의적인 수업으로 감동을 주셨다.
교수님을 만나면서 중년도 참 괜찮구나 싶어 나이가 들어감이 겁나지 않았다. 전문직의 길을 걸으면서 일은 프로답게 하면서도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여유와 낭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교수님이 몸으로 보여주신 삶의 교훈이다.
이밖에도 정말 많은 분들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이 자리에 왔다. 대학 시절 어느 책에서 읽은 “사람을 버리는 일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을 지키는 데는 신과 인간의 끊임없는 은고(恩顧)가 따라야 한다.”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사람을 지킨다는 것, 참으로 어렵고 위대한 일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는데 우리 선생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이미선 소장은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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