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을 안고 처음 교단에 섰을 때,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 시절 학교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체벌도 욕설도 당연했고 비민주적 학교문화도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어 우울했는데, 아이들과 수업하고 만나면서 희망을 보았다.
내 삶의 큰 의미이자 희망이었던 아이들을 떠나 교육청으로 온 지 어느새 15년이 넘었다. 처음 교단에 발을 디뎠을 때처럼, 그 시절 교육청 문화는 경직되고 권위적이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요즘의 교육청 문화는 그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혁신되어 유연한 생각과 민주적인 모습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지만, 관료체계가 주는 갑갑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이들에게서 그랬듯, 교육청에서도 사람에게서 희망을 본다. 경륜이 주는 여유와 그릇이 큰 리더에게서, 아직 젊고 비판적이며 열려있는 젊은 장학사, 주무관들에게서 그 기운을 강하게 느낀다. ‘사람이 희망’임에 틀림없다. 여전히 나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다.
* 부산교육의 희망을 읽다 - 전문직 아카데미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는 김석준교육감의 공약으로 2015년 설립되었다. 좌우 이념이나 색깔을 떠나 교육정책연구소는 데이터에 기반한 현장 중심의 연구로 중장기적인 부산교육 비전을 제시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씽크탱크 Think Tank’다. 우리는 오직 아이들과 학교현장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고 연구한다.
연구소가 하는 사업 중 내가 좋아하는 대표적 일은 ‘전문직 아카데미’ 운영이다.
요즘 학교는 거의 교직원 다모임을 통해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토론을 거쳐 결정한다. 혁신학교, 민주적인 학교일수록 전문적학습공동체, 교직원 다모임이 잘 운영되고 그 의견이 존중된다. 이번 코로나 시국에서도 전문적학습공동체나 교직원 다모임이 잘 작동된 학교에서는 교육부나 교육청의 지침만 바라보지 않고 학교 안에서 구성원들이 충분히 반영하여 신속하게 움직여 별 무리가 없었다는 연구 보고서가 많다.
전문직 아카데미는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퇴근 후 저녁 시간에 모여 하루 3시간씩 독서토론을 하거나 교육청의 주요 정책에 대해 발제를 하고 토론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다. 이 모임에 특히 애정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자발적이라는 것이다. 일이 너무 많고 바쁜 장학사들이 불금 저녁 시간에 귀한 시간을 내어 그것도 자비로 회비를 내면서까지 공부하는 모임에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올해 들어 세 번을 진행했는데, 3월 첫 시간부터 우리는 서로 통(通)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솔직하게 각자의 일상을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장학사가 온다고 하면 대청소를 해야 했기에 엄청난 존재인 줄 알았다. 교사 시절에도 장학사라 하면 뭔가 잘 보여야 하는 존재,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막상 장학사가 되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장학사는 본연의 장학 업무 외에도 다양한 민원, 의회 등에서 제출하라는 자료 처리로 정신없이 바쁘다. 그러기에 업무에 대한 기획이나 발전 방향 등은 밤에 남아서 할 수밖에 없어 야근하는 날이 잦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더 긴박하고 놓칠 수 없는 일이 늘어났다. 보건, 안전, 학사 업무 등을 맡은 장학사의 숨돌릴 시간조차 부족한 사연을 들을 때는 서로 공감하고 토닥이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위로의 시간이었다는 뒷이야기가 많았다.
4월에는 김훈 작가의 ‘연필로 쓰기’ 책을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누었는데,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보건 업무를 맡은 김 장학사는 보건교사가 되기 전 죽음을 눈앞에 둔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로 일한 경험을 들려주며, 죽음이 멀지 않고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잘 사는 일 그 이상으로 잘 죽은 일이 중요하겠지.
5월 모임은 우리교육청 주요 정책인 ‘삶을 디자인하는 진로진학 교육’에 대해 다섯 명이 발제를 하고 토론시간을 가졌다. 자유학기제, 고교학점제, 진로체험 프로그램, 다문화학생의 진로진학, 학교 부적응 아이들의 진로진학문제 등으로 다양하게 접근해 자칫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을 일깨우고 공유할 수 있어 뜻깊었다.
이날은 예고 없이 교육감님도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샌드위치를 먹고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 한층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전문직 아카데미 회원이 교감 나가기 전 저경력 장학사로 구성되어 비교적 젊은데 그런지 이런 사람들만 희망해서인지, 여느 교육청 회의 때와는 달리 무겁지 않고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다고 주저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 다~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같은 듯 다른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고민도 조금씩 열어서 보여주고 교육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생각을 나누는 ‘전문직 아카데미’ 참 좋다.
강물이 굽이굽이 돌고 돌아도 포기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바다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길도 기꺼이 가는 것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 이미선 소장은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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