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사(小史) - 물방울이 작은 강 되기까지 (3)

조실부모 그리고 반려자와의 만남

박찬명 승인 2021.05.06 12:45 | 최종 수정 2021.05.10 14:07 의견 0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뒷줄 왼쪽)

외숙부네는 초량역 앞동산에 있는 집으로 주거를 정하였고, 우리집도 초량역 옆 판자촌에 입주하였다. 당시 아버님은 국제시장에서 금 장사를 하시면서 많은 돈을 버시었고, 판잣집 동네에서 우리집이 유일한 2층 집이었다. 인심 좋으신 엄마는 늘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분위기 좋은 생활을 하셨었다. 그 당시 나는 부산중학교에 전학하고, 엄마는 내가 열심히 과외 공부를 하도록 하여, 후에 서울고 편입시험에 통과되는 밑거름을 만들어 주셨다.

아버님은 본래 사업가이셨기에 서울로 올라와서는 청파동에 집을 사고 남대문 근처에서 목재소를 개업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자리가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자리였다.

나는 당시 서울고 2학년 때 탈홍수술을 받게 되어 1년 휴학하였고, 1년 뒤 복학할 때 점점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 병세가 폐결핵으로 판명되면서, 우리집은 내우외환이 닥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아버님은 연속된 사업실패와 건강쇠약으로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폐결핵 악화로 마산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학업을 접고 돈을 벌어야 될 형편이라 아버님께 내 뜻을 말씀 드렸더니 화를 내시면서 야단치셨고, 억지로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교복 차림에 모자를 벗고 시내를 활보하는 나

졸업식날 아버님은 남루한 털 코트를 입으셨고, 기념사진 찍는 우리에게 접근도 안 하시고, 멀리서 바라만 보시고 계셨다. 사진을 찍을 때 내 옆에 아가씨가 있었기에 폐가 될까봐 그러셨는지, 그 때 아버님께 가서 지금의 아내인 내 애인을 인사시키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되었다. 아버님은 그 뒤 돌아가셨고 우리집은 더욱 곤궁해져 갔으며, 마산요양원에 계신 어머님께는 아버님 별세하신 것을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고 청파동의 우리 집안이 망했는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셨는지 우리집 앞에 있던 우물가집 처녀와 연애가 시작되었다. 어머님이 쇠약한지라 며느리는 튼튼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결혼해야 되겠다는 판단으로, 우물가집 처녀의 행동을 관찰하던 중, 결정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창밖을 보니 우물가에서 그 처녀가 장작을 패고 있지 않은가? 그 전부터 그 처녀 조카(3살)가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오곤 했는데, 나는 요즘 가끔 농담으로 “갓난아기 조카를 미끼로 나를 꼬셨냐?”고 말하면 마누라는 펄쩍 뛰고 야단난다.

그 처녀가 지금 내 마누라고, 서울고 졸업 때 느티나무 아래서 사진 찍을 때 있었던 그 처녀다. 그 처녀 이름은 유시정이다. 당시 창덕여고 3학년생이었다. 우리는 청파동 7번지 앞뒷집에 살면서 수시로 만났고 사랑은 계속 익어갔다.

서울고 졸업식날. 오른쪽 끝이 현재 아내인 창덕여고 3학년 유시정.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어머님한테 갔을 때, 아버님 별세한 것을 알릴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서울에 계실 때 한동네 살면서 옆집 처녀를 보신 바가 있어서 그날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시고 몸은 건강하냐고 물으셨다. 그 뒤 1년 후쯤, 어머님마저 돌아가셨고, 우리 5남매는 고아 신세가 되었으며, 생활은 더욱 막막하게 되었다. 장남인 나는 가족부양의 책임자로 막노동이라도 해야 될 지경이라 전전긍긍할 때, 친척 중 천주교 독실한 신자였던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신당동 안주교님 관사로 갔으며, 안주교님의 추천서를 받게 되어 이 추천서를 염창동 낙현성당 이철규 신부님께 드렸고, 그 후 경향신문사 발송과로 발령이 나서 입사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그럭저럭 동생들과 헤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여기에는 유시정(그 처녀)의 헌신적 희생이 따랐다. 결국에는 나와 동거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유시정 집에서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처형들이 유시정을 잡으러 집에 오고, 결혼 못한다고 선언하였으나 우리는 도시락을 싸들고 도망다녔다.

부모와 남매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리밥 싸들고 피신하면서까지 나를 사랑했던 나의 아내 유시정(1958년경 덕수궁에서)

덕수궁, 도봉산, 뚝섬 등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 나갔다. 결국은 결혼 승낙이 되었고 1959년 4월 19일 결혼식을 올리고 떳떳한 부부가 될 수가 있었다. 결혼식장에는 친척, 친지, 직장동료 등 많은 하객이 왔으며 특이한 것이 있는데, 맏딸 박정란이 돌잡이로 장모 품에 안겨 참석하였다. 신혼여행은 이미 한 것으로 하고, 시내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들어가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이 스무살에 조실부모 하게 되고 5남매의 장남이니 아주 막중한 팔자로 태어난 존재 아니겠는가? 그러나 고난을 같이할 반려자를 만났으므로 역경, 또 역경을 참고 살 수 있었고 우리 5남매도 헤어지지 않고 단칸방에서 살았다.

처는 나와 동갑이었으나 나보다 사려가 깊고 마음이 착해 남을 배려하는 심성이므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고생고생 끝에 작은집을 장만할 수 있었고, 더 열심히 노력 끝에 세를 주고 다른 집을 사고 이런 일을 몇 번하면서 기반을 닦아 나갔다. 그러던 중 한국표준협회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고 아내는 더욱 분발하고 노력해서 생활이 안정되게 되었으며, 삼남매 출가를 마치고, 손자손녀 출가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내 아내는 나를 가족의 중심으로 만들어 주어 나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내 아내 유시정 여사가 뒷바라지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조실부모 당시 막내 여동생의 나이는 6살이었으니 내 아내와 나는 4남매의 부모 역할로 살게 되었고, 현재 64세인 막내는 언니(내 아내)를 친정엄마라고 생각하고 있다. 5남매중 3째인 남동생은 1965년도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남매들은 모두 평범하게 살고 있다. 75세 여동생, 68세 남동생, 63세여동생, 그리고 내 나이 78세가 되었으나 아직은 생각과 마음은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아들 연구실 인테리어 공사 중

그러나 내 처가 척추골절로 수년간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쓰리고 아프다. 평생 고생만 시켰는데, 그 고통을 고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 괴롭다. 병원에서는 허리와 다리에 근육을 키워 현상유지하는 것이 최선책이라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매일 밤 자기 전에 기도를 하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첫째는 나의 못남과 잘못을 용서해 주십사는 것, 둘째는 내처 유시정의 착한 심성을 헤아리시어 유시정의 허리와 다리절임을 좀 더 낫게 해주십사는 것, 셋째는 사회의 빈곤과 병곤의 어려움을 치유해 주십사는 것이다. 요새는 세월호 참사로 처음에는 구조되기를 기도하다가 이제는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주실 것을 간곡히 기도하고 있다.

<전 한국표준협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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