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6년 음력 12월 27일생이고 평안북도 철산소학교 앞에 사셨던 외할아버지 집에서 아침 6시경 태어났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중국 천진에서 사업을 하고 계셨기에 나는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시기에 외갓집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도 보고 싶고 걱정도 되고 해서, 나를 들쳐 업고 중국 천진으로 떠났는데 듣기로는 무려 15일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기차형편이 열약하고 중간에 고장이 나기도 했단다. 그 와중에 한 살인 나는 눈병이 생겨 여정에 치료도 못받고 해서 ‘도라움’이라는 병이 나고 결국 지금도 왼쪽 눈이 큰 글씨도 못보는 시력 -0.8 정도다.
어머니나 외삼촌으로부터 주로 들었는데 천진 집은 중국 당시에 부촌이었다고 한다. 성(城)처럼 성문이 있고 마을 전체에 돌담 울타리가 있었으며 우리집은 2층집이었다. 2층은 다다미방같이 되어 있었으며 손님이 오셨을 때 응접실로 쓴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4살 때 큰 홍수가 범람해서 우리집 1층이 잠기고, 2층에서 한동안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형님 병이 악화되어서 돌아가신 것으로 추측되며 어머니는 극진히 병간호하시었고, 그 후유증인가는 모르겠는데 어머니도 내가 19살 때 폐결핵으로 마산요양원에서 별세하셨다. 어머니의 별세는 아버지의 사업에도 정신적 타격이 되어 아버지도 1년후 별세하셨다. 설상가상으로 내 나이 19살 때 탈홍과 치질이 악화되어, 서울고등학교 3학년때 1년 휴학하고 입원치료 하였다.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서 회상한다면 중국 천진에서 7살짜리 나는 당시 한국학교에 다녔고(유치원) 아버지 사업이 번창하여 어머니와 나는 편안히 다복한 생활을 하였고 여동생 순명이도 태어나 더더욱 행복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집밖으로 나가 천진 시내를 돌아다녀서 이는 어머니에게 큰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내 나이 7살이던 1943년 가을에 우리집은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으로 귀향한다. 부자였던 아버지는 평안북도 선천역 앞에 위치한 자리에 한옥과 제재소를 짓고 농토를 많이 장만하여, 희망찬 조국에서의 사업을 일구어나갔다. 당시 수준으로는 엄청난 호강이었으며 이사올 때도 택시로 귀향하였다고 한다.
나는 소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였는데 당시는 모두 살림이 어려운 때였는지라 아이들은 맨발로 등교하였으며 나도 집에서 나와 학교 근처까지는 운동화를 신고 가다가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신발을 벗고 등교하였다. 아이들과는 무척 재미있게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 뒤의 밭을 지나 한참가면 냇강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물놀이를 자주하였다. 하루는 비온 뒤 물이 많고 물살이 센 날이었는데, 통나무를 타고 강을 가다가 통나무를 놓쳐 익사할 뻔하였으나 또 다른 나뭇가지를 붙잡고 겨우 살아났다. 농수로의 수로가 모아지는 곳 웅덩이에서는 다이빙으로 경쟁한 기억도 있고 개구리, 잠자리를 잡고 놀며 개구리도 구워먹은 기억이 난다.
1945년에 감격적인 해방을 맞아 우리 식구 모두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환영하고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우리집은 풍비박산(風飛雹算) 나는 현실이 되었다. 나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도 끝이 났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하셨는지 야밤에 우리를 이끌고 피난하여 황해도 해주로 피신하셨다. 그 때 피신하지 않았다면 다음날 인민재판에서 숙청되었을 것이고, 우리 식구는 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주로 피신할 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몸만 빠져 나왔는데 다행이 어머니가 평소 보석을 좋아하고 수집한 것이 많이 있어서 그것이 후일 우리집을 연명하고 월남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피신 전에 행복했던 선천의 우리집은 유지의 집이라고 해서 소련군을 초청하여 연일 잔치를 베풀었고 성의를 다했었다. 하지만 적화된 세상에서 우리집은 유산계급(bourgeois)으로 몰려 숙청 대상이었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 미래를 생각하고 야밤 도주까지 하면서 우리 남매를 악의 세계에서 구출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이러한 결정과 선택에 관해 나이를 먹으면서 더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소학교 4학년에 취학하고 약 1년간 산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1947년경 어느 추운 초겨울 우리 가족은 월남을 단행하였다. 바닷가까지는 식구들이 분산하여 어느 지점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나와 여동생은 소풍 백을 지고 그 지점에 가다가 검문에 걸려 구금되게 되었는데, 그 때도 돈이 통했는지 안내원을 보내 풀려났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약 500m를 걸어가야 배가 있었는데 캄캄한 밤에 찬 바닷가를 힘들게 걸어가 배에 도착하였고, 배는 소리 없이 개성을 향해 출항하였다. 개성 근처 모 부두에 도착하여 맨 먼저 방역을 받게 되는데 DDT를 뒤집어쓰고 눈이 매워 울었던 기억도 난다. 개성을 경유하여 결국 서울에 입성했다.
수용소에서 한동안 있다가 우리집은 육군 중위였던 6촌 친척의 도움으로 중구 묵정동 관사로 입소할 수 있었다. 당시 내 나이 11살인가 싶다. 묵정동 관사시절은 즐거운 기억 뿐이다. 친구들과 동국대 동산에 올라 하루 종일 전쟁놀이를 하였고 여러 가지 내기 등 많은 놀이를 하였다. 그 많던 그 당시 친구들 지금은 어떻게 늙었을까? 많이 보고 싶다. 하지만 행방도 모른 채 세월이란 강이 흘러갔을 뿐이다.
묵정동 관사 생활을 1년쯤 지나 접게 되고 부모님이 생업을 위해 강원도 영월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식품점을 운영하면서 아버지는 서울을 왕래하면서 일종의 무역을 하셨다. 나는 당시 동대문초등학교 5학년에 취학하고 외삼촌과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중학교는 서울공업고등학교 건축과로 입학하였으나, 얼마 다니지도 못하고 우리나라의 비운인 6.25를 맞게 되어 인민군이 들어오고 식량도 없는 비참한 삶이 시작되었다.
당시 외삼촌은 부모님의 강원도 사업을 돕기 위해 영월에 계셨고 서울엔 외숙모와 내가 용산의 셋집에 살고 있었다. 외숙모는 날품팔이를 하고 나는 과일 행상 등으로 연명하던 중 나는 강원도 부모에게 걸어서 가기로 결심하고, 외숙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장 10일 이상 걸려 조치원을 경유하여 기찻길로 강원도 영월에 가게 된다.
<전 한국표준협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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