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에 해방과 6.25를 맞아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성장한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다. 서울고를 졸업한 시점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 해에 어머님도 돌아가시게 되어 졸지에 5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다행히 천주교 안주교님의 추천과 낙현성당 김철규 신부님의 주선으로 경향신문사 발송과에 입사하여 근무하게 되어, 박봉으로 5남매의 호구지책을 이어가던 중 갑자기 경향신문이 폐간이 되었고, 나는 다시 깊은 산속에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될 형편이라 나는 어머님과 친하게 지내셨던 월남 친지의 도움으로 간이 문방구(일명 하꼬방)를 한양대 앞에 있는 덕수초등학교 담벼락 옆에 차리게 되어 간신히 굶지는 않고 내 처와 5남매, 6식구가 단칸 셋방에서 겨우 목숨만 유지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세상에 벼룩이 간을 빼먹지!,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도 사기 치는 놈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로 인해 세상이 무서운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는 온 사회가 북한처럼 쌀이면 생활의 전부인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쌀을 싸게 판다는 얘기를 믿고, 쌀을 넘겨준다는 언덕너머 동네로 따라나섰다. 언덕에 이르러 바로 저 집인데 여기서 기다리라 하길래 순진한 나는 그를 믿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 당시 쌀 한가마면 우리 식구의 두 달치 식량이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내 처는 잊어버리자고 나를 위로하였으나, 그 뒤 한동안 후회하면서 살게 되었다. 나를 경향신문에 취직시켜준 김철규 신부님을 찾았을 때 나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하느님이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하시다는데, 왜 세상은 전쟁도 나고, 졸지에 몰락하는 가정도 생기고, 한마디로 착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셔야 되는데, 갑자기 불행이 닥치게 될 때 어째서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신부님 말씀은 이러하셨다.
“모든 일은 인간의 책임이며,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을 인간은 알 수가 없고, 그 뜻은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무조건 하느님을 믿고 공경해야 하며 추호도 의심해서도 안된다.”
신부님다운 말씀이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돌아가신 김철규 신부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큰 뜻을 우리 인간이 어찌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런 생각을 내 나이 60이 지나면서 갖게 되었으니 그동안 나는 하느님 속을 썩인 못된 놈이였으리라. 그래서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기도할 때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못나고 죄 많은 놈을 용서하여 주시고…”
하꼬방 문방구를 하면서도 내 처는 악착같이 푼돈을 모아(밥솥을 긁어먹고 살아) 동네 집을 살 수가 있었다, 한양대에서 공무원 교육이 있었을 때 우리는 김밥장사, 세탁물 등 닥치는 대로 돈을 벌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양대의 공무원교육원까지는 꽤 높은 곳인데도, 나와 처는 김밥을 지고 이고 가서 팔았고 어느 날은 팔지 못하게 되어 며칠씩 김밥만 먹은 적도 있다. 세탁물을 내가 수집해 오면 내 처가 손빨래를 하고 와이셔츠는 다리미로 다려서 납품(개인간)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경향신문이 복간되어 나는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내 처는 우리집 점포(세주었던 것)에서 자영업을 하여 우리는 맞벌이가 되면서 돈을 모으게 되었다.
봉천동 집을 팔고 잠실 장미 아파트를 사게 된 것은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막내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중학교 담임과 내 처가 아이 진학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장래를 생각하여 강남 쪽의 고등학교로 입학시키라고 조언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한양대 앞 점포주택 지하방에서 살면서, 잠실 장미아파트(28평)를 구입하고, 그 뒤 28평을 매도하게 해준다는 약속으로, 32평 아파트를 매수했는데, 약속과 달리 28평은 매각이 안 되어 한동안 곤란을 겪었다. 허나, 맞벌이하는 내 처의 내조 덕에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1가구 2주택이 되었고, 그 후 28평을 팔아 정리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천우신조요, 하느님의 큰 뜻이 어떻게 역사되는지 나에게는 증명되었으며, 이제는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식구들이나 지인들에게 하느님의 참뜻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개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이번 참사도 하느님의 참뜻이 있는가? 인간이 잘못하여 모든 재앙이며, 사고가 발생하겠으나, 어떻게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가? 인생의 앞날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다시 증명되었다.
경향신문 복간으로 우리집은 오랜만에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그 후 나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로 옮겨 열심히 일한 결과 발송과에서 보급부로 승진되었고, 과장을 거쳐 3년만에 차장으로 승진되었다. 차장이 된지 2년쯤 되었을 때 부국장인 분이 서울신문사 국장으로 전직하면서 나를 부장으로 스카웃하여 데리고 갔다.
서울신문사는 지금도 보급이 어렵지만 그 당시도 같은 여건이라 이를 타개해 볼 요량으로 보급부 1, 2부는 시판부(수도권), 지방부로 개편되어, 나는 시판부장으로 발령 받았는데, 갖은 방법을 강구해 보았으나 여의치 못하게 되어 1, 2부를 원래대로 통합하게 되니 나는 내 자리를 잃게 되어 사퇴하게 되었다. 중앙일보 차장으로 그냥 있었으면 늦게나마 부장으로 승진되고, 생활안정을 유지했을 텐데 부장으로 승진된다는 제의에 성급히 결정한 내 미련함을 후회하였고, 그 뒤 약1년가량 실업상태로 있다가, 옛날 내 친정인 경향신문사 보급부로 다시 입사하였다.
경향신문사는 나의 최초직장이었고 발송과 직원이 보급부로 돌아온 것은 약10년 세월이 지난 뒤였다. 그 뒤 경향신문을 문화방송이 접수하면서, 나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으니 인수위에서 나를 부장으로 결정하여 수십명 동료 중에서 특진되는 영광을 누렸다. 부장이 된지 한 3년쯤 되었을 시기에, 상사와 의견 충돌이 빈번해졌고 그 뒤 나는 욱하는 마음에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고생길에 들어선 것이다.
한 6개월 동안을 퇴직금으로 버티다가 더 이상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되어 한양대 앞 점포에서 자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월급생활 수준은 안되었으나 비교적 현상유지는 되고 있었다. 열심히 살다보니 나에게 다시 행운이 찾아왔으니 선배 지인의 소개로 한국표준협회(KSA) 업무과장으로 입사하게 되었으며, 졸지에 맞벌이 형국이 되면서 저축할 수 있는 여유가 되었다. 그 뒤 20년간 표준협회에 근무하였고, 전북지부장과 인천지부장을 거쳐 정년 말년을 맞아 약 2년간은 연구위원으로 있다가, 1998년 IMF 직전에 퇴사하게 되었고, 퇴직금과 저축한 자금으로 현재 살고 있는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상가주택을 구입하였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자녀보다 6명 손주 위주로 지원하면서 보람을 갖고 산다. 아들은 대학교수로 있고, 두 딸은 한 대 앞 점포에서 10년가량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손주들은 대체로 착실하게 성장하여 둘은 결혼하고 하나는 이화여대 성악과를 나와 시 합창단 소속이고, 둘은 현재 성균관대, 연세대 재학 중이고 막내는 군입대해 있다. 나는 1남2녀의 자식을 두었다. 아들 쪽에 1남1녀, 큰딸에게도 1남1녀, 막내딸에게 2남으로 모두 6명의 손주가 있다. 모두모두 잘 성장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집 가훈은 “선견·선지·신념”을 기본목표로 “스스로·힘껏·마무리”로 생활하자이다.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면 나는 너무 성급한 판단으로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하였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래서 내가 인생에서 느낀 것이 가훈으로 표현된 것이며, 앞으로 남은 여생이나마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착실한 인생을 살고 불우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마지막 직장 퇴직 전 나름대로 노후대책 이랍시고 당시 갖고 있던 6천만원을 증권에 투자했는데, IMF가 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증권은 휴지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우둔하고 못난 짓이었는가? 당시 나는 6천만원을 퇴직 전에 키워 사업자금으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완전실패작이었다.
그래서 퇴직금 받고는 딴 생각을 일체 저버리고 상가주택을 구입하여 생활의 안정을 우선으로 했다. 증권으로 사업자금 마련은 완전실패했지만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 큰 다행이고, 실패한 증권 경험이 나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이제는 자녀 손주들 잘되기만 바랄 뿐이고, 우리 부부의 건강 우선으로 생활하고 있다.
<전 한국표준협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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