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비극 6·25가 발발하여 외숙모, 조카, 내가 용산에 살면서 갖은 고통을 겪었다. 먹을 것이 없어 나는 내 입이라도 덜고 부모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결심한 후, 중학교 입학 때 상으로 받은 영어 콘사이스와 통성냥을 책가방에 잔뜩 넣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통성냥은 농촌에서는 당시 귀한 물건이라 음식을 구걸할 때 쓰기 위한 생각이었다.
영월까지 가는 길을 몰라 무작정 기찻길로 가기로 하여 계속 걸어갔다. 수원을 지나 천안쯤 갔을 때 해가 기울고 있었고, 배도 고파서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 사정을 얘기하니, 음식을 차려주시어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신세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운 분이고 축복받으실 분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인사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길을 나섰다. 하루가 지나서 조치원역에 도착하였고, 요기를 하려고 뭔가를 찾으니 그 동네가 장날이었다. 거기서 빈대떡 파는 아주머니를 만나 성냥 1통을 드리고 빈대떡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싸이렌이 울려 사람들이 “공습이다!”라고 외치며 피신하고 있었다.
나는 겁도 없이 빈대떡 먹던 것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빈대떡 파시던 아주머니가 나를 뒷집 지하실로 숨도록 하였다. 지하실에 숨자마자 쌕쌕이로 불리던 제트기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펑”하면서 건물이 크게 흔들렸고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지나 주변이 잠잠하여 아주머니와 같이 나와 보니, 집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져 웅덩이가 깊이 패어 있었다. 만약 지하실로 대피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그 때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길을 떠나 철길 따라 영월을 목표로 길을 재촉하였다. 이 때부터는 고개가 많았고 인적도 없는 적막한 산간을 헤쳐 나가는 난(難) 코스 지형이었다. 지금 중간의 지역명을 기억할 수 없는데, 어느 터널을 지날 때 캄캄한 속에서 내 다리를 붙잡는 것이 있었는데 인민군 부상병들이 들어 누워 있는 곳을 내가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 나살려라”하는 심정으로 도망쳐 나오니 해는 저물어가고 철길로 가기에는 무서움이 생겨 마을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저 멀리 등빛이 보여 무작정 찾아갔다.
터널 지나가는 곳은 높은 곳이고 민가까지는 계속 내리막이었지만 길이 없으니 돌과 숲, 나무 사이를 헤쳐 내려가면서 손발이 터지고 다치게 되어 피가 흐르고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한 두어 시간 사투 끝에 민가에 도착하여 도움을 청했는데, 동정심이 있으신 노부부가 나를 측은하게 맞이하였다. 우선 씻을 물을 주시었고, 다친 곳에 약도 발라 주셨다. 나에게는 천사 같은 분들이셨고 죽을 고비를 구해주신 은인이었다. 저녁 밥상을 차려 주셨고 잠자리도 마련해 주셨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영월로 떠나려고 하는데 노부부는 전쟁 중에 어딜 다니냐며 만류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찾아가는 심정을 말씀드리고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방에 남아있는 통성냥을 드렸다. 지금까지가 집 떠난지 4, 5일 되었을 것 같다. 이제는 철길이 아니고 길로 가기로 마음먹고 걷고 또 걸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때로는 달리고 때로는 쉬고 계속 걸어갔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앞에 리어카에 짐을 실고 가는 사람이 보였다. 너무 반가워 뛰어 가보니 부부와 딸 아이였는데, 나를 보고 어디를 혼자 가느냐고 묻길래, 영월 부모님 집을 찾아 서울에서 걸어오는 중이라고 하니 놀라시면서 부모님은 전쟁이 끝나고 잠잠할 때 만나고 자기네 피난가는 곳에 같이 가자고 하시었다.
딸 아이는 나보다 어려 보였고 예쁘장하게 생겼었다. 그 부모님은 나를 측은하게 여겨 도와주실 마음이었고, 아들이 없는 집에 아들 하나 구했다는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고마우신 분이나 나는 부모님 만나는 일을 중단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말씀드리니 몸조심해서 가라고 하시면서 다른 길로 떠나셨다. 그 노부부와 같이한 시간은 단 하루였으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연세가 50세 정도로 보였는데, 자기네가 도시에서 장사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며, 딸아이 자랑이며, 그 당시 나는 흥미롭고 신기하게 들었었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느껴보지 못한 가족애가 있어 보였고, 많이 부러움을 느꼈다.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어느 밭두렁에서 쉴 때 콩서리도 하였고 과일밭을 지날 때는 참외를 따먹기도 하였다. 그 노부부로부터 영월 가는 방향과 길안내를 받아 한 이틀을 가다가 인민군 초소에서 검문을 받았는데 책가방 속에 렌즈가 있었고, 성적표에 번호가 16번이었는데 나이가 16살이면 입대해야 되고, 렌즈는 무엇에 쓰느냐며 트집을 잡아 영창에 집어넣고 하루 동안 본부와 연락한 결과 나이가 14살로 판명되고 렌즈는 호기심에 따른 장난감으로 보고 겨우 방면되었다.
구금되어 있을 때 주변엔 여러 명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은 풀려나지 못하였으리라. 나도 방면되지 못했다면 아마도 북송되어 수용소 생활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월남(越南) 가족이기 때문이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때로는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였고 땡볕을 뚫고 며칠을 고투한 끝에, 영월군에 입성하게 되었다. 아직도 부모님 계신 곳은 한나절이 더 걸리는 거리인 영월발전소 제3공구, 일명 새말지구였다.
그 때부터는 뛰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부모님 사시는 집이 보이는 언덕에 이르렀다.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100m 달리기 식으로 들이닥쳐 ‘엄마!’를 외치고 집에 들어가니, 이게 웬 일인가, 아무도 없지 않은가? 부모님은 어린 동생 4명을 데리고 가게를 하시면서 사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니 눈앞이 깜깜하였다. 그 때 그 집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를 맞이하여 주셨다. 펑펑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시면서, 하시는 말이 부모님은 며칠 전 부산으로 피난 가셨다고 하였다.
월남한 부모님께서는 인민군이 진주하면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부득이 피신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점령된 서울에 자식을 남겨놓고 할 수 없이 영월에서 부산으로 피신하신 부모님의 심정이야 오죽 했을까?
길바닥에서 한참을 울고 발버둥을 치던 나는 정신을 차려 아주머니가 일러주시는 대로 그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집을 나온 지 10일 만에 영월 집에 온 것인데 부모님은 피난가시고 남에게 의지하는 내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 집에서는 나를 잘 보살펴 주셨으며 그 집 아이들이 여럿 있었고 마을에 내 또래들과 잘 어울려, 그 때부터 시골 농촌 생활이 시작되었다. 밭도 매고 산에 가서 놀기도 하고, 나무 짐도 지고 내려오면, 하루가 지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찌는 듯이 더운 8월이라 강에서 헤엄도 치기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개구리를 잡고, 구워먹기도 하였다.
겨울철로 접어들어서는 꽁꽁 얼은 냇가에 나가 썰매도 타기도 했는데, 하루는 얼음판이 깨져 나는 물에 빠져 흠뻑 젖게 되어 동상에 걸리기 직전이었는데 친구들이 나뭇가지를 주어모아,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려 입고 집에 왔다. 동네 친구들과는 콩을 구워놓고 먹으면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 집에서 반년 가까이 지내고 있었는데, 9.28 수복이 한참 전에 되었다고 듣게 되었다. 나는 귀경하기로 마음먹고 주인집에 고맙게 잘 지내고 간다고 인사하고 10일이나 걸려 오던 서울을 향하여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이번에는 화물열차가 있으면 무조건 타고, 기차가 더 이상 안 가고 방향이 다르면, 내려서 지나가는 화물트럭에 올라타고 하여, 2일만에 집에 도착하였다. 용산집에 도착하니 아버님이 벌써 부산에서 올라 오셨다. 정말이지 눈물의 상봉이었다.
다음날 외숙모, 조카, 나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고 부산역 앞 동네인 동광동 옛집에 당도하니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포옹해 맞이하셨다. 엄마는 장남인 나를 사지에 남겨두고 피난 와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게 생활하셨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엄마 건강은 그 때 타격을 받아 뒤에 폐결핵이 발병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전 한국표준협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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