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대략 세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위기는 아버님의 연거푼 사업실패와 별세, 다음해에 어머님마저 별세하시어, 나는 졸지에 5남매 중 장남으로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완전 무일푼 이었고 집은 빚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고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런 궁핍하고 희망이 없을 때에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을 찾게 되고 때로는 일이 여의치 못할 때 하느님을 원망도 하면서 살게 된다.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그 슬픈 생활 속에서 나는 안 주교님의 추천과 낙현동 김철규 신부님의 주선으로 경향신문사 발송과에 취직이 되었다. 당시 나이 스무살, 미아리 할머니(먼 친척)가 평소 우리 부모님의 신세를 지었음인지, 나를 안 주교님께 데리고 가서 사정사정하여 성사가 된 것이다.
할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나는 평생 노동을 해보지도 않았고 왕자같이 곱게 키워졌는데 발송과일은 노동이었다. 하지만 신체단련의 기회가 되었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간신히 호구지책이 되었고, 동생들 학업도 근근이 유지되었고, 생활의 안정을 갖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는 내 처 유시정 여사의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돌이켜 회고하면 나는 불효자식이었다. 아버님께서 사업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졌을 때, 학업(서울고 3년)을 포기하고 나름대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면,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으리라. 고등학교 선택도 부모님은 큰아들 장래를 생각하시어 대학진학을 염두에 두셨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차라리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내 인생은 성공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김원규 서울고 교장선생님의 방침은 영국의 이튼스쿨과 같은 엘리트 교육이었다. 훈화를 하실 때는 영국의 이튼 고등학교를 늘 말씀하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못 넣도록 아예 꿰매게 했으며, 지각에는 엄한 벌이 수반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굶어가며 졸업을 했으나, 나 같은 처지에는 아무 소용 없었을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교훈은 아직도 나의 뇌리와 내 생을 지배한다. “사람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첫째 그 자리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 둘째 그 자리에 있어도 무방한 사람, 셋째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반드시 첫 번째 사람! 그 자리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음인지, 당시 장남의 책임감을 다하였고, 지금은 가족의 중심에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앞으로 내 여생이 좀 더 있다면, 그것은 사회를 위한 인간이 되어야 될 것이다.
내 처는 나보다 불우이웃 도움에 적극적이다. 지금은 허리가 아파 아주 큰 일은 못하고 있으나, 옛날에 처음 집을 샀을 때 구들장도 직접 놓아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고 최근까지도 도배 장판이며 웬만한 집수리는 직접 하였다. 그 틈에 보조역할(데모도)인 나는 모든 일에 관여해야 하였고 내 처는 그렇게 해서 인건비 절약으로 번 돈이라고 나에게 비용을 청구하면 안 줄 수 없고 내 처는 그 돈을 불우이웃 돕기로 사용하곤 한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처의 헌신적인 사랑과 불우이웃을 위한 도움정신을 존경하며 나도 따라 같이 행동하다 보니, 나도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되라는 서울고 故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을 다소나마 실행한다고 위안을 갖고 있다. 우리 부부는 자식들에게 늘 덕을 쌓고 살라고 하고 그래야 너희들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사이는 왜 이 기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
완전 무에서 시작된 내 인생에서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차츰차츰 생활이 안정되고 나아지는 것이 내 보람이었다. 그래서 노동을 해서 피곤해진 몸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단련되어갔고, 인생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미래의 희망을 생각하게 되었고 신문사 발송과에서 보급부로 영전되어 더 열심히 근무하였고, 차장을 거쳐 부장으로 승진되었다. 근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나에게는 남다른 노력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마지막 직장이었던 한국표준협회의 생활은 신문사와 다른 면이 있었으며, 한국의 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부장 시절에는 각종 행사에서 기관장으로 대우 받았으며, 품질관리 경진대회에서는 심사위원으로 활동도 하였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였다. 소학교시절에는 콩쿠르에서 수상도 하였고, 고교1년 시절에는 합창단원이었다. 고2년부터 가세가 기울고 모친의 병세악화로 음악감상이 휴식의 취미로 된 것 같다.
나의 특기는 무엇인가? 언뜻 말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소년시절에는 음악가, 학창시절에는 건축가, 청년시절에는 실업가가 꿈이었던 나에게 현실은 허용치 않았고, 내 인생이 각박해지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특기는 소멸된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못 찾고 지내는지 자문해 본다. 남은 여생에서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애창곡은 이태리 칸초네인 ‘오솔레미오’와 우리 포크송 ‘바위섬’이다.
<전 한국표준협회 연구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