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릴로의 소설 『언더월드』의 주요 인물인 닉 쉐이는 쓰레기 처리 업체의 간부다. 그런 그가 1951년에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세기적 야구 경기의 결말을 뒤집은 그 홈런공을 구입하는 데 집착한다. 그리고는 결국 그 공을 손에 거머쥔다. 그러나 독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가 그 공에 집착한 이유는 그것이 성공을 상징하는 물건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 공이 ‘불운과 상실의 미스터리’이면서 ‘패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고가에라도 구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공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에는 성공과 실패, 행운과 불운이라는 양극을 함께 내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자본주의 세상의 뒷문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평생에 걸쳐 절대적으로 소유하고자 했던 그 물건을 손에 쥐고서 닉 쉐이는 “드디어 이 공이 내 것이 되었어. 그런데 이걸로 무얼 할 수 있지?”라고 반문한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값비싼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드릴로를 연구한 데이비드 톰슨의 말대로라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비행술의 발전이 이전까지 인류가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더 넓은 세계시장을 무대로 생산과 소비를 펼칠 수 있게”해 주었다. 즉, 생산에 따른 소비 시장은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었고, 이러한 교통 연결망 확대에 더해 인터넷 연결망이 합해지면서 세계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생태학>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불행하게도 “지구는 하나의 우주선이라기보다는 떠돌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상점이 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듯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화려해지는 상점의 뒷골목엔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이렇게 버려진 쓰레기는 더 이상 매립지조차 찾지 못한 채 “쓰레기로 가득 찬 선박 안에 실린 채 바다 위를 떠돌거나”, 운이 좋으면 기자(Giza) 피라미드보다 더 큰 높이의 거대한 쓰레기 산이 되어 한곳에 정착하기도 한다. 이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쓰레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오늘날 쓰레기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골치 아픈 해결과제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그것이 창조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버려진 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파괴되며, 쓰레기가 먼저이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극심한 쓰레기 생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소비’라는 욕망과 함께 태어나고 성장한 현대인들에게서 소비 행위를 막을 방법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현대사회에서의 소비는 결국 현대인들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 자체이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기호들의 세계”가 되었다는 소설 속 내용처럼, 내가 더 많은 것과 더 값진 것을 살 능력이 되면 될수록 내 삶의 의미와 나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시대에서 소비는 또 하나의 미덕으로서 자본과 연계되어 더욱 부추겨진다. 그러기에 소비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장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과로서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에 막대한 돈과 에너지를 쓰고 있다.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또 다른 시장이 형성되고 그것은 또 다른 쓰레기를 생산한다. 결국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쓰레기로 인해 그 정착지를 떠나면서 생겨난 것으로서, 세계사에서 인류가 이동하거나 남의 땅을 정복한 것은 자신들이 버린 쓰레기로 둘러싸여 더 이상 그곳에서는 숨을 쉬거나 살 수 있는 공간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소설 속 드릴로의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소설 『언더월드』에서 드릴로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에 대처하는 현대인들의 노력을 대략 4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매립과 매장, 재활용, 상품화, 그리고 예술 작품화가 그것들이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자 오래된 방법은 매장 또는 매립이다. 땅을 파고 묻거나 외딴 곳에 버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매장해버림으로써 안심했던 쓰레기가 토양과 하천을 오염시켜 결국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쓰레기 매립 중 가장 두려운 결과로 다가오는 것은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핵폐기물’일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고자 한다.)
드릴로가 보여주는 또 다른 쓰레기 처리법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실행하고 있는 재활용이다. “가정에서 우리는 시리얼 박스의 납지를 뜯어냈다. 우리 집에는 신문지와 깡통들과 항아리 병들을 분리하는 통을 넣어두는 재활용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깡통과 병들을 헹구어 낸 후 각각의 재활용 통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재활용품 역시 과연 어떻게 재활용될 수 있으며 그 재활용 역시 언제까지 가능할지가 문제다. 결국 모든 것은 쓰레기로 귀납될 뿐이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쓰레기 처리법은 이것을 상품화하여 재판매하는 것이다. 소설 속 주요 소재인 ‘홈런공’ 역시 알고 보면 쓰레기다. 이제 더 이상 공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 채 그 기능과는 다른 의미의 새로운 상품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드릴로는 이러한 쓰레기 상품화의 범위를 ‘박물관’이나 ‘관광지’로까지 확대시킨다. 오래전 인류가 쓰다 버리거나 남겨놓은 물건들이나 장소들이 현대에 와서 다시 관광 상품으로 변모되어 자본과 결합하여 팔리고 있는 것을 그 일례라고 말한다. 이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문명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쓰레기들을 과연 인간은 언제까지 상품화하고 재판매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마지막으로 드릴로가 제시하는 쓰레기 처리법은 ‘쓰레기의 예술품화’다. 소설 속에서는 인간쓰레기들이 살고 있는 벽의 외관에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마치 쓰레기의 포장지를 바꾸고 새로운 상품으로 변모시키듯이 버려진 공간을 재탄생시킨다. 이러한 모습은 현시대 예술의 다양한 장르에서 우리가 만나는 ‘업사이클링 아트’(up-cycling art)와 도시 재생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드릴로의 냉혹한 시선에는 이러한 행위들 역시 쓰레기 처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로써 드릴로는 ‘쓰레기는 한 순간에도 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밀려드는데 그것을 재활용하고 재상품화하고 예술화하는 게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능할까’라고 묻는 듯하다.
“쓰레기를 개방된 곳으로 가져와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그것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도록 만들자. 쓰레기 처리 시설을 숨기려 들지 말자. 쓰레기를 위한 건축물을 세우자.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건물을 화려하게 꾸미고 자신들의 쓰레기를 들고 오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자.”(『언더월드』 중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파묻어 버린 언더월드 역시 우리의 세상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영문학 박사 / 인문학당 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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