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돈 드릴로의 『마오Ⅱ』는 굳이 종교나 정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 속에서 줄곧 있어왔던 ‘하나됨’의 군중에 대한 이야기이자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 중인 자아를 잃어버린 개인들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름으로 타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누군가는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일 거라는, 또는 우리와는 다른 악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는 평범한 인물이거나 오히려 아주 똑똑하고 자아가 강했던 사람임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기에, 소설 속 캐런의 아버지처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라면서 어떤 비밀을 찾아내고자 한다. 소설 속에서처럼 멀쩡하던 내 딸이 상식으로 믿어지지 않는 한 무더기의 군중 속에 들어가서 이제까지의 자아를 잊은 채 살아가겠다는 결심에는 무언가 외부의 강력한 압박이나 위협이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다. 물론, 캐런과 같은 종교 집단의 사람들은 나치 전범들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의 생각에 지배될 수 있는 현상은 이와 유사해 보인다. 수없이 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내 몬 독일의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다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생각 없음’을 그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아이히만은 ‘조직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상부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말로써 죄 없는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스스로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말미에서 아렌트가 단 한 번 내던지는 이 결정적인 표현인 ‘악의 평범성’은 결국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판단 능력을 잃어버린 채 누군가에 의해 의식을 장악 당한다면 당신도 바로 그 아이히만이 되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아렌트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는 극단적인 정치 부정’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를 말살함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고 다원성과 자율성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체제 아래에서의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사유와 판단을 잃어버리고 체제 또는 누군가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아이히만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잃어버린 채 조직에 의해 입력된 대로 자동으로 행위한 데 대한 유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렌트의 전체주의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드릴로의 소설을 다시 들여다보자. 우선 『마오Ⅱ』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러한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제목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 덧붙여, 본 저자는 이 소설 전체가 또 다른 ‘마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 본다. 추측했듯이, 이 소설의 제목 ‘마오’는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건국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오쩌뚱’(모택동)을 의미하며, 앤디 워홀이 마오쩌뚱의 사진에 실크스크린 용법으로 다양한 색채를 이용하여 만든 예술 작품에서 차용해 왔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원본이 다양한 사본을 만들어 내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마오가 사망한 지 약 4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천안문 광장에는 여전히 그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그의 시신조차 미라로 보존된 채 수많은 관람객들과 추종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처럼 마오의 원본은 사라졌지만, 그의 아류 또는 유사상품들에 해당하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사상은 제2의 마오로서 영원히 존재할 듯하다. 그것은 제 2, 제3으로서가 아니라 모두가 원본에 대한 두 번째 작품들인 셈이며, 어쩌면 생존 당시의 마오라는 인물 역시 원조는 사라지고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제2의 마오였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더 이상 원본과 복제품의 구별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마오도 스스로가 만들어낸 제2의 마오이며, 그의 어록에 의해 재탄생한 수많은 추종자들 역시 제2의 마오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 덩어리의 군중 또는 무리가 된다.
소설의 시작에서 보여준 특정 종교 단체의 행사 속 사람들의 모습은 마오쩌뚱을 중심으로 동일한 사고와 행동으로 중국 현대사의 광풍을 만들었던 문화대혁명 시기 사람들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는 일부 종교집단이나 정치단체에 의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다양한 사건들, 그리고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 불가능한 폭력적, 배타적 행위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렌트의 정의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나와 다름’을 적으로 여기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악’으로 여기면서, 그들을 모두 배척하고 처단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한 생각, 동일한 행위’의 결과로 이어진다. 거기에 ‘개인’의 망설임이나 ‘반대’나 ‘저항’은 용납될 수 없다. 나치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은 그 잘잘못과 전혀 무관하게 ‘공공의, 태어나면서부터의 절대 악’이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원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떻게 이처럼 불합리한 주장에 설득을 당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은 선량한 일반 시민들과 지식인들조차 나치의 주장에 동조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그리고 이것의 중국 버전이 극단의 ‘마오주의’에 의한 정치적 동란일 것이고, 한국에서는 현대사에서 자행되었던 숱한 정치 이데올로기적 학살과 만행들일 것이다.
현대사회를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현대사회는 오히려 개인을 잃고 여러 형태의 다양한 전체주의 사회를 향해 나가는 듯하다. 사랑과 자비를 설교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나와 다름’을 ‘절대 악’으로 정의 내리고 공격하는 모습들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비종교적이기까지 한 설교를 신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쳐서 자신과 다른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선거철이면 등장하는 지역주의에 의한 공격은 어떠한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로 단죄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과, 특정 지역에 태어난 것이 원죄가 되어 늘 공격을 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음양의 자연적 조화라 여겼던 여성과 남성 또한 각자의 무리를 지어 서로를 악으로 물어뜯으며 싸우고 있지 않은가.
정작 문제는 이러한 논리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이 결코 특정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이거나 정치적 독재자이거나 악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극히 평범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바로 그 무리 속의 한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니, 나 역시 어느새 어떤 무리에 휩쓸려 핵심을 잃은 채 허우적거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됨’에 있어서도 무리와 연대는 분명 다른 것임을.
<영문학 박사 / 인문학당 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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