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아프카니스탄 정권을 장악한 후 그로 인한 혼돈과 인권 유린에 관한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이에 앞서 미얀마에서도 쿠테타에 성공한 군부세력이 저항하는 국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탈레반 용병들이나 미얀마 쿠테타군들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습에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조직 또는 집단에서의 명령이라 하지만 어찌 저렇게 인간이 인간에게 잔인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인간의 역사 곳곳에서 우리는 이미 권력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잃은 상대(또는 개인)에게 행한 극악무도한 행위들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21세기 문명사회가 아니던가.
이러한 현상은 단지 해외의 정치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과거 우리 현대사에서 숱하게 경험한 바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형태의 무리에 의한 개인에 대한 가혹 행위 또는 무리 간의 납득할 수 없는 공격적인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집단 폭력과 혼돈을 겪으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나 아렌트가 던진 화두처럼 “나는 이해하고 싶다.”
돈 드릴로의 1991년 소설 『마오Ⅱ』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이 소설은 1976년 미국 뉴욕의 양키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던, 통일교도들의 합동결혼식으로 시작된다. 캐런이라는 이름의 스물 한 살짜리 여성은 이날 결혼식을 치르는 6500쌍의 신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인 총재”가 정해준 한국 남자와 결혼식을 치르고 있다. 관중석에 앉은 그녀의 부모는 너무도 믿기 어려운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쌍안경으로 딸을 찾고 있지만 모두가 똑같은 모습을 한 신부들 속에서 도저히 딸을 구별해 낼 수가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그들은 이제 한 몸,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캐런의 부모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왜 저기에서 저러고 있는 것일까.
“그 아이는 건강하고, 똑똑하고, 스물 한 살이고. 진중한 편이고, 자아가 뚜렷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졌고, 어딘가 미묘한 그늘도 있다. 이런 두드러진 특성들의 그물망, 그것들은 그들이 그녀로부터 결코 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캐런의 아버지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캐런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는 온전한 축복을 받았음을 느낀다. 그들 모두는 같은 느낌이다. 50개 국에서 모인 여기 이 젊은이들은 모두 자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느낀다. 모든 재난과 육체적 고통을 털어버린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옷 속에 서 있는 스스로가 누구인지 잊어가고 있다”. 즉,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캐런은 ‘군중 속에 묻혀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느낀다. 더 이상 자신의 판단을 위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자신만의 모험의 길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만 살면’ 그것이 최고의 삶이라 믿기에 오히려 평화롭다.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총통의 명령이 진리이듯이, 종교에서 교주의 생각이 진리이고 삶의 방향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신만의 판단이나 생각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합동결혼식을 치르는 13000명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종과 국적과 나이와 이름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결코 각각이 아니다.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그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일한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찬물로 샤워를 한다.” 그 이유는 총재님이 “사탄은 냉수 샤워를 싫어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잠을 얼마나 잘 거야, 다섯 시간 아니면 네 시간? 네 시간. ... 그녀가 말했다. 너희들은 잠을 얼마나 잘 거야, 세 시간 아니면 한숨도 안 잘 거야? 한숨도 안 자.”(26)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교도들과 함께 꽃을 팔러 다니는 캐런은 “승합차 안에서는 진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을 느낀다. 이와는 달리 그들에게 “차창 밖은 타락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 타락한 세상을 사탄이 지배한다. 물론, 그 사탄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그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녀는 안전한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바깥세상으로 나가느니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도록’ 배운다. 그리고 배운 것을 ‘함께’ 외치고 기도한다.
이러한 군중의 모습은 소설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마오(毛)의 책을 암송하는 중국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을 모든 중국인들과 하나가 되게 한 거라고요. 무슨 책이냐고요? 마오의 책 말이죠. 『마오쩌뚱 어록』. 그 책은 인민들이 어디를 가건 지니고 다니던 바로 그 신념이지요. 그들은 그 책을 암송하고, 머리 위로 흔들고, 끊임없이 전시했습니다.”(247) 중국을 소용돌이로 이끌었던 문화대혁명의 역사에서 마오는 “단결에의 요청이자 모두가 똑같은 복장으로 함께 사고하는 대중에 대한 소환”이었다. 통일교에서 문선명 총재 스스로가 신격화되었다면, 마오쩌뚱의 경우에서는 오히려 그를 매개로하여 그를 추종하는 ‘군중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신처럼 강력한 존재가 된 셈이다. 그들은 모두가 각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변의 절대적인 생각으로 하나로 뭉치고 힘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드릴로가 1부의 마지막에서 “미래는 군중의 것이다”라고 단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제 “역사는 군중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그 군중은 자유의지와 판단을 가지고 다양성을 소유한 각각의 개인이 모인 연대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인 신념과 행위로 뭉친 거대한 덩어리일 뿐이다. 마치 누군가의 의미 없는 외침에 우루루 몰려다니는 영화 속 좀비 같은 형상이다.
집단의 이러한 모습은 거대한 종교 행사로 시작하여 마오의 이야기로, 그리고 소설 말미에서는 아랍의 테러집단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자신들의 지도자 얼굴을 그린 셔츠를 똑같이 입은 채 각자 자신의 얼굴은 두건으로 가린 소년병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에 대해 묻는 사진작가 브리타에게 이들의 지도자인 아부 라시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아이들에게 비전을 주고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할 겁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모두 아부 라시드의 아이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이죠.”(346)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인질로 납치되어 감금된 한 시인에게 이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가혹한 방식으로 대한다. 아이들은 배우고 지시 받은 대로 행할 뿐이다.
결국, 드릴로의 『마오Ⅱ』는 인간 개개인의 다양성과 자유는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서로 적대적인 하나’로 뭉치고 있는 작금의 우리 사회 모습에 던지는 하나의 경고로 들린다. 나아가, 자신의 사고는 배제하고 이미 정해 놓은 답안을 놓고 빨리 암기하도록 만들고, ‘자유’와 ‘책임’ 보다는 오히려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에 대한 경고로도 해석된다. 나아가서 이러한 ‘자신만의 생각 지우기’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편에서 계속)
<영문학 박사 / 인문학당 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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