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 『장소시학』 2호를 펴내며

장소시학 승인 2023.01.31 16:46 | 최종 수정 2023.02.02 12:23 의견 0

『 장소시학』 2호를 펴내며

 

지난 해 12월 창간호를 낸 뒤 열 달만에 2호를 낸다. 이번 호 특집 장소는 경남 의령이다. 이를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의령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기회를 누렸다. 걸음길을 같이 해 준 경남시인회 분들 마음에 너른 지도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근대 문학사나 경남·부산·울산 지역문학지로 볼 때, 의령 출신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작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미 1920년대부터 무리를 지어 문예 활동이 활발했던 이웃 합천, 진주, 밀양, 동래 지역과 크게 다르다. 경남 안쪽에서도 지역차가 뚜렷한 셈이다. 그런 가운데 을유광복 뒤부터 1950년대에 걸쳐 과작이긴 했으나 읍내 이정호, 가현 출신 시조 시인이자 연구가 남경, 『영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조 시인 조종만, 진주 시가족 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시인 이덕과 『자유문학』을 거친 조순, 조인영과 같은 이가 있었다. 그 뒤를 다시 1960년대 제해만이 이었다.

그런데 의령은 이러한 문필 활동과 달리 실천궁행하는 의향으로서 모습이 어느 소지역보다 뚜렷하고 눈부시다. 그것은 일찍부터 곽재우 장군과 의령 의병을 기리는 역내 전통에서부터 시작하여, 근대 시기 설뫼 안희제나 안호상, 읍내 이우식과 듬실 리극로로 이어지는 근대 광복 항쟁가, 계몽 지식인의 실천 활동이 웅변한다. 그들의 의로운 기개와 풍모 아래서 의향 의령의 지역 가치는 드넓은 남강과 낙동강 두물머리 물살처럼 넉넉하다. 그런 이들의 밑자리에 홍암 나철 선현이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대종교의 겨레 사랑 또한 든든했다.

이번 2호 특집으로 의령 역내를 향한 문학 전통으로 홍의장군 곽재우와 리극로, 그리고 제해만에 초점을 모았다. 곽재우 장군 경우는 아직까지 학계나 지역사회에서 놓치고 있는 자리, 곧 북한 쪽에서 바라보는 눈길을 짚는 글과 고향 의령에서 이루어졌던 리극로의 어린이청소년기를 꼼꼼하게 비정한 글을 선뵌다. 한정호, 김봉희 두 분이 그 일을 맡아 주었다. 특별히 김봉희 교수의 글은 북한에서 이루어진 곽재우 담론에 관해 첫 문을 열었다. 앞으로 이어질 글을 기대한다.

제해만은 비교적 이른 50대 나이로 삶을 마감한 시인이다. 다혈질의 지도교수 밑에서 궂은 일, 어려운 공부 길이 너무 버거웠던 탓일까. 경북․대구 지역에서 그냥 교사로 시인으로 삶을 오롯하게 이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문학인이다. 의령 지역문학으로서는 아까운 인재 한 사람을 타향 서울에 내던진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시에서는 한결같이 사향의 심사가 넘친다. 박사 학위 논문마저 고향 의식을 따지는 공부였다. 그러한 제해만을 위한 글 꼭지를 동시 중심으로 경희대 김용희 교수가 채워 주었다. 앞으로 다른 갈래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이루어지리라. 의령 장소시에서는 각별히 전훈(1925-1950)의 유작시 6편을 맨 앞에 올린다. 광복기 경남․부산을 대표하는 언론 시인이 『부산일보』 문화부장 정진업이었다. 그 곁으로 고려촌, 전훈과 같은 청년 시인들이 활발한 문필 활동을 폈다. 『부산일보』 편집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전훈(본디이름 전임수)은 애꿎게 사상범으로 몰려 옥 안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한없이 빛날 20대 청춘이었다. 그 일로 정진업마저 현업에서 쫓겨나야 했다. 집단 권력과 제도가 한 개인에게 어떠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지 뚜렷하게 보여 준 본보기다. 다행히 남은 작품을 아들 전희구가 갈무리하여, 회고록 『피어오를 새날』(2004) 속에 남겼다. 그 작품을 앞세워 1958년 『자유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조순과 제해만의 사향시를 실었다. 거기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의령의 신예 시인 김영화, 구자순의 작품까지 더한다. 앞으로 수준 높은 의령 장소시를 많이 만날 수 있기 바란다.

의령 회향기는 전희구·정복수·황인 세 분이 맡았다. 전희구 는 선친 전훈 시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신원을 이루고자 노력하신 분이다. 일찌감치 회향기를 마무리했는데, 출판이 뒤늦어 마냥 송구하다. 앞으로 기회가 닿이면 전훈 시인의 언론 문필을 죄 찾아 광복기 경남․부산 지역문학의 풍향계 속에서 제대로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을 과제로 남긴다. 회향기를 빌려 집안 내림과 아울러 소년기 궁류 지역에 얽힌 몇몇 기억을 오롯하게 되살려 주었다. 한 사람의 개인 기억이 의령의 소중한 집단 기억으로 되사는 즐거움이 큰 글이다. 각별히 봉황대와 얽힌 지역 여성 민속과 추억이 그 점을 더한다. 여기에다 미술사회 쪽에서 보내온 회향기 두 편이 놓인다. 당대 대표 화가 가운데 한 분으로 활동이 한결같은 정복수 화백과 미술비평가 황인의 살뜰한 회향기가 그것이다. 각별하고도 꼼꼼한 눈길 속에 의령의 지난 한 시절이 오롯하게 되살아나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풍물시다. 전희구 님의 것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니면서 의령 지역지로서 오래 남을 소중한 글이다. 정 화백의 개성을 잘 담은 작품을 화보와 표지에 올릴 수 있는 기회까지 얻어 즐거움이 더한다.

의령 답사기는 김영화와 하순이 시인이 맡아 주었다. 김영화 시인은 의령 문학지도 마련을 마음에 두고 몇 차례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의령 역내 문학인들부터 앞으로 지역의 집단 문학적 기억으로 잘 활용하기 바란다. 이정호 시인의 선친 이시목의 삶자리 앞뒤를 뒤쫓은 하순이 시인의 글 또한 의령 역내에 많은 울림을 줄 수 있기 바란다. 이우식이 겨레 언론 중외일보를 이끌 때 그 일의 핵심 편집국장 자리를 이시목에게 맡길 정도로 둘 사이는 속겉으로 깊었다. 아들 이정호 시인이 오히려 선친의 그늘에 갇혀버린 꼴이다.

의령 지역 발굴 문헌으로서는 재북 시기 리극로가 만년에 고향을 바라고 썼던 사향 수필 세 편을 올린다. 그 가운데「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조준희가 엮은 『 이극로 전집』 (2019)에 실린 것이나, 다른 두 편「철새」와「매봉재와 룡마산」은 미발굴로 남은 글이다. 세 편을 실으면서 짧게「리극로 사향 수필 세 편을 소개하며」를 붙여 그 뜻을 알도록 했다. 앞으로 언제 다시 의령을 밟을 수 있을지 모르나 제대로 된 문학 전통의 큰 줄거리를 거듭 찾을 수 있기 바란다.

신작시 자리는 올해 봄 첫 시집을 냈던 경남시인회 다섯 분의 작품으로 엮는다. 아직 먼 그 다음 걸음길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 굽이 한 굽이 자기 삶과 문학의 걸음길이 무럭무럭 자라리라 믿는다. 거기다 신예 구자순 시인의 신작시 10편이 더했다. 서평 자리에서는 봄에 냈던 경남시인회 다섯 분의 첫 시집을 대상으로 삼았다. 최영호, 정훈 두 비평가가 맡아 주었다. 한번 출판하면 마냥 떠내려가는 시집들이 태반인 세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 다시 시로 살아온 길을 다잡고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한 성찰 작업이 서평이다.

경남·부산 지역 문학예술지에서는 차수민과 글쓴이가 꼭지를 올렸다. 차수민은 지난 창간호에 이어 본향 고성의 문학 전통을 되살리는 어려운 작업을 마다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삶의 앞뒤를 다 밝히지 못한 안타까움이 크나, 고성 근대 첫 문학인이자 어린이문학인이 김재홍이다. 그이로 향했던 시인의 열정이 오롯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그 덕분에 1920년대 고성 지역 밤배움의 현실과 김재홍이 이끌었던 창명학원 소년 문사의 발자취까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고성 지역문학 전통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차수민의 글 뒤에 김해의 문학예술 전통을 다룬 글쓴이의 글을 놓았다. 김해 출신 월북 미술가 기웅(1912-1977)의 재북 시기 작품 활동을 공론화하는 첫 논의다. 근대 초기 1세대 여성 교육자며 우리나라 첫 사회주의 여성 항쟁가가 우봉운이다. 그런 우봉운을 어머니로 둔 기웅을 김해 역내는 물론 경남 ․ 부산 지역 문학예술 전통으로 소개하는 즐거움은 크다.

이번 호부터 수필란을 새로 마련한다. 시인의 장소 체험을 문제 삼은 ‘시와 장소’가 그 하나다. 처음을 황동규 시인이 맡아 주셨다. 시인은 피란지 부산, 대구에서 청소년기의 어려움을 아버지 황순원과 함께 겪었다. 그런 속살은 후기시 곳곳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번 수필은 시인이 부산 서대신동과 영주동 40계단 언저리에서 겪었던 피란 시절의 고통과 가족지를 일깨워 준다. 거기다 경남시인회 다섯 시인의 첫 시집에 관한 짧은 후일담 줄글을 더했다.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죽죽 벋어나가는 아름다움이 늘 그미들에게 깃들기 바란다.

『 장소시학』 은 공모 신인과 추천 시인 두 꼴로 좋은 지역 신인을 소개하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창간호에서는 제1회 추천 시인으로 의령 구자순 시인을 내보냈다. 이번 호에는 제2회 추천 신인으로 합천 정유미 시인을 소개한다. 독특하면서도 발랄한 말씨 속에 웅숭깊은 마음자리가 넉넉하게 터를 이룬 시인이다. 그미의 앞날을 중견 비평가며 개성 뚜렷한 시인 강연호, 권혁웅 두 분이 축하해 주었다. 자신이 선 자리를 힘차게 밟아나갈 것을 믿으며, 정유미 시인의 앞날을 격려한다.

바람 소리도 겨울을 준비하는 10월이다. 3집은 더 빠른 시일 안에, 더 좋은 속살로 만날 수 있기 바란다. 자그만 것이건 큰 것이건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너무도 평범한 사실이지만 그런 이치를 잊고 살지 않도록 마음 다잡기란 늘 어렵다. 지역 안팎으로 자기 몫에 모자람 없을 삶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분투하고 있을 많은 글쓴이들을 떠올린다.

2022년 10월

박 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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