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특집 : 답사기】 의령 문학을 밟다 - 김영화

장소시학 승인 2023.03.20 18:48 | 최종 수정 2023.03.26 12:20 의견 0

답사기

 

2022.1. 시인 조순과 조인영의 고향 화정리에서

의령 문학을 밟다
- 제해만·조순·조인영·이정호·전훈 시인 생가 나들이

김 영 화

 

다섯 시인이라니. 더구나 낯선 이름을 받아 들고 적잖이 당황했다. 의령읍 동동에서 중리, 화정, 궁류를 아우르는 길을 나서며 시인들이 나고 자란 곳이 더 궁금해졌다.

일찍이 의령은 충의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임진창의 18의병장1), 백산 안희제, 남저 이우식, 한뫼 안호상, 한글학자 고루 이극로 선생 등 애국지사가 앞선 자리에 있다. 과히 의병의 고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그렇다고 문학이 뒷자리에 있지는 않다. 지역대학과 문화원에서 인물과 문집을 발굴하고 학술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2) 아쉬운 것은 주로 조선시대 전후 유학자들 연구가 대부분이다. 글쓴이가 문화원과 군청 문화관광과에 다섯 시인의 흔적을 알고자 방문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을 찾은 셈이다.

첫걸음은 코끝이 시린 1월에 했다. 한 차례 방문으로 온전히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학업을 위해 고향을 일찍 떠났던 시인들. 몰랐던 만큼 태어난 터에 성큼 발을 내밀었다.

 

『바람의 집』을 나오다

충익사를 왼쪽으로 끼고 남산천을 따라가면 진주 방향 국도가 이어진다. 봄을 기다리는 벌통들이 생기를 차리는 듯하다. 읍에서 20여 분. 가야시대 축성되어 임진년 수리하여 곽재우 장군이 크게 전승을 올린 벽화산성 푯말을 지나면 운곡마을 초입이다. 감 농사가 주 작물임을 한눈에 짐작할 ‘덕실 감빛마을 체험장’이 먼저 맞는다.

제해만 시인은 1944년 의령읍 중리 538번지에서 아버지 제태인과 어머니 강갑순의 혼인으로 태어난 5남 중 막내다. 현재 ‘의령읍 중리로 95번지’가 시인의 생가다. 지금은 조카 제정목 님이 거주하고 계신다. 생가는 원래 목조건물이었다 한다.

벽화산을 마주하고 집 뒤 언덕배기 감나무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고랑 사이로 사다리를 옮겨 다니며 가지치기하다 제정목 님은 글쓴이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기억하는 대로 얘기를 들려달라 말씀드렸다. 대구교대를 졸업한 후 경북 경주시 천북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단국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숙모(부인)가 직장생활을 해 할머니가 시인 댁에서 뒷바라지하며 고향을 많이 그리워했다 한다. 보여줄 게 있다시며 집안에서 초등교과서(『국어 읽기 5-1』, 2002)에 수록되었던 「목련꽃」 액자를 건넸다. 지금까지 간직하고 계시니 그 애정을 짐작해 본다.

시인은 196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꽃싹」 입선, 신아일보 백일장에 시조가 당선되면서 문학사회에 나왔다. 1968년 한글문학에 동시 당선, 1976년 시문학에 시 추천이 완료되었다. 1983년 대한민국 아동문학상, 1995년 소천아동문학상, 1997년 방정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초중고 교사와 대학 강사로 활동하며 5권의 시집 도시의 서쪽, 꿈같은 흐름, 바람일기, 먼 기억 속으로, 저녁 강4권과 동시집 바람의 집, 어른들은 모르셔요, 별 찾기를 냈고 1997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후 2001년 유고 동시집 너를 만나고 싶다가 나왔다치열하고 쉼 없는 학문 활동과 창작이 시인의 삶을 앞당겨 거둬갔을지 짐작해 본다.

엄마,/제비가 왔어요.//엄마는 들은 척도 않고/빨래를 하십니다.//아빠,/새싹이 나왔어요.//아빠는 들은 척 않고/비질을 하십니다.//어른들은 정말 모르셔/말다툼이나 하시고/돈 걱정이나 하시고.//할머니,/여기 꽃이 웃어요/빙그레 웃어요.//무슨 소리냐?/꽃이 웃다니!//정말 어른들은 모르셔//꽃이 웃는 것도/모르시나 봐.

- 제해만, 「어른들은 모르셔」3)

애송되고 있는 동시다. 시인은 위 동시에서 어린이의 천진하고 꾸밈없는 시선과 경직되고 닫힌 어른의 대비된 모습을 통해 동심을 끌어내고자 한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치환하는 동시다.

제해만은 바람의 집(월간문학사, 1982) 후기에서 동시는 시를 쓰는 어려움 외에 언어의 선택, 단순하면서 예술성을 유지, 자라나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토로한다. 그의 시에 대한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인은 시집만 아니라 ·시조 창작강의(외길사, 1993)를 펴냄으로써 평론과 창작의 안내자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 특히 이장희 전집(문장사, 1982)은 고월 이장희의 시 전 작품, 그의 시에 대한 연구논문과 문헌자료들을 함께 실었다. 요절 시인 이장희에 대한 헌사였다.

 
제해만 시인의 생가-조카 제정목이 신축, 거주하고 있다
제해만 시인의 생가-조카 제정목이 신축, 거주하고 있다

‘산이 하늘 노릇하는 마을’

진주 지수 방향으로 곧장 이어간다. 왼쪽 화정천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일별하고 마을버스를 천천히 뒤따른다. 동네 어귀 전봇대 양쪽으로 현수막이 가로질러 펄럭인다. ‘화정초 경남 작은학교살리기사업 선정’을 축하하는 알림 띠다. 학령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탓일 것이다. 평생교육 개념으로 학교를 바라본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배움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도 좋을 터다. 다행히 페교의 위기는 벗어난 것으로 짐작되어 마음이 가볍다. 다시 찾은 화정 가로길은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졌다. 언제부터인가 농로 가까운 국도에 이팝나무가 흔해졌다. 곡식이 소복소복 꽃처럼 영글라고 재촉하는 것인가. 곧장 남강 모래톱이 펼쳐졌다. 골재채취 공사 허가 현황판 너머 굴삭기 두 대가 정박해 있다. 강줄기 따라 둑방길이 나란하다. ‘의령 명품 100리길 양귀비 꽃길 구간’이다. 5월 개화한다는데 초순인데도 연분홍 진홍빛 꽃양귀비가 앞다퉈 피는 중이다. 보라색 수레국화도 무더기로 피었다. 보천과채마을에서 3년째 조성하고 맞는 꽃길이다. 언젠가 누리집을 보니 파프리카, 블루베리, 가지, 애호박, 메추리알을 꾸러미로 만들어 판매하는 마을이다. 모르긴 해도 마을 사람들의 열정이 넉넉히 와 닿는다.

마라톤 코스와 자전거 길로도 유명하다. 글쓴이가 마라톤 풀 코스를 처음 완주했던 길이다. 싱그러운 남강에 눈길을 뺏기다 보니 어느새 화정면사무소 앞에 도착한다. ‘상정리 조씨고가’가 자리한 곳이다. 창녕조씨 종가 건물로 조선시대 부유한 농가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우물가 댓돌에 놓인 놋 요강과 흰 고무신이 한편 시를 본 것 같았던 기억이 새롭다. 골목은 크기가 제각각인 자연석이 흐트러짐 없이 바짝 어깨를 모았다. 돌담길이 모나지 않게 둥글게 이어진다. 두 시인의 고향 마을이다.

화정면 상정리 조씨 고가, 조순 시인 생가로 후손이 고택을 관리하고 있다
화정면 상정리 조씨 고가, 조순 시인 생가로 후손이 고택을 관리하고 있다

조순 시인의 후손을 만났던 때를 떠올려본다. 몇 해 전 문학기행 때 같이했던 동료가 시인의 시집을 마루에 펼쳐 놓고 읽고 있었다. 후에 글쓴이가 시인의 삶을 더듬을 날이 올 줄 모를 때이다. 시인의 아내 사진이 걸린 벽을 보았던 것도 같다.

조인영 시인의 생가는 공터로 남아 오랫동안 묵은 탓인지 풀과 잡목이 무성했다. 마을회관에서 때마침 나온 어르신이 ‘조 선생님’ 집이었음을 기억해내셨다. 돌담 너머 빈터를 보고 시인의 흔적을 느껴보자 했으나 시간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다만, 동네를 감싸고 있는 둥근 산새에서 고즈넉한 마을의 평온을 느낀다.

불현듯/고향이 날 부르기에/버스 타고/산이 하늘 노릇하는 마을로 갔다/귀신같은 큰 집 툇마루/놀 속에 놀고 계시던/하얀 노인네들 내 고함 소리를/먼 앞산 바라보듯 듣고 계셨다/버림받은 노인네들/도시에서 쫓겨/ 지금은 헌 옷처럼 편안한 고향 집에서/적막도 비어 있는/햇살을 받고 계셨다//문전옥답 넘기고/눈물 팔아 공부시켜 장가 보낸 자식들/도시에게 다 빼앗기고/외톨박이 밤인 양/밥에 뉘처럼 내뱉기어 주소도 없었다/하얀 노인네들이 모여/어린 시절의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해도 잊어버린 마을/산이 하늘 노릇하는 마을/귀신같은 큰 집 툇마루

- 조순, 「촌 2」4)

조순 시인은 1928년 화정면 상정리에 태어났다. 진주사범대학, 중앙대학, 경남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1954년부터 부산에서 교사로 1987년 경남대학 강사를 지냈다. 1958자유문학항아리, 해녀, 5월의 소녀를 발표하며 문학사회에 나왔다. 시단, 한국시동인. 갈숲동인지를 이끌었다. 시집 전후戰後에 비는 내리는데(신흥출판사, 1961), (태화출판사, 1983), 눈물 씻은 눈으로(혜진서관, 1987), 작은 행복(우리문학사, 1994)을 냈다. 시인은 연작시에서 시각, 청각, 미각이 한껏 질펀한 가락을 선보이며 의령 고향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시집 작은 행복, 푸르름-오당과 미강시편에서는 면암 최익현을 사사한 족친 오당 조재학(항왜항쟁)과 의병장 미강 최문현의 절개와 기개를 노래했다.

시인은 부산 문단에서 최계락 시인과 각별했으며 사숙으로 모신 이주홍은 결혼식 주례를 맡기도 했다. 1982년 눌원문학상을 수상했다. 1997년 부산 종합운동장 입구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유고시 「산으로 간다」가 새겨져 있다. 1995년 시인은 화정면 상정리 선영에 잠들었다.

어제는/시제에 다녀왔었다.//자동차가/불티재를 넘고/마을에 들어선다/마을은 텅 비어 졸고 있다/시제 나서는 짐꾼이 없어 난감하다/내 손으로 차려들고/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할아버지 앞에/선다.//강을/건너야 한다/강물은 얼어 있고/나룻배는 매여 있다/강가에/포플러 한 그루/추위에/떨고 섰다.//헐렁 벘었던/산은/정정한 나무들로 가득하다/가르마 같은/묘도는 이미 없어졌다/쓰러져가는 고가는/비어 있고/빈 집처럼/종손의 옆자리도/비어 있어/차려 놓은 제수 앞에/혼자/외롭다.

-조인영, 「시제(時祭)날」5)

어렵지 않은 시다. 고향 시제에 참석한 날 선산의 풍경과 소회를 담담하게 그렸다. 조인영은 필명이고 본명은 조인상曺寅相이다. 1925년 화정 상정리 465번지에서 태어났다. 화정공립보통학교 4년과 의령공립보통학교에 편입 6년 후 졸업했고 1943년 동경고등공학교 토목건축학과(부속공과 3년, 본과 2년)를 나왔다. 이후 경남제일교원양성소 수료 뒤 해인대학교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시인의 동인 활동은 『석동산고집石童散稿集』(교음사, 1990)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1950년대 말 ‘시가족’으로 동인 활동을 시작하여 첫 시화전을 가졌으며 1961년 『영도선』 동인지를 창간하였다. 『영도선』은 그 뒤 5집까지 나왔다. 『영문嶺文』에도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는 『조인영시집 1』(새로출판사, 1980), 제2시집 『지리산 소식』(작가정신, 1998)과 44년 교직생활을 마친 후 낸 수필집 『석동산고집石童散稿集』이 있다. 이후 조인영 시인의 자취와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답답하던 차에 경남문학관의 도움을 받아 문학지에 실린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조인영 시인 생가터-화정면 상정리465, 현재 행정 개편으로 465-1번지로 바뀜-로 공터이다
조인영 시인 생가터-화정면 상정리465, 현재 행정 개편으로 465-1번지로 바뀜-로 공터이다

그러나, 시인은 2019년 12월 9일 작고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진주 본가에 거주하고 있는 차남에게 들을 수 있었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노년의 시인을 뵐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시인은 2남 3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대학교수로 은퇴하였고 차남은 진주 모 대학 교수 재직 중으로 교직에 계셨던 부친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았다. 차남 조용수 교수는 평소 아버지께서는 본인의 문학 활동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이 없었다고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철저히 독립적이셨다는 강한 어조에서 시인의 곧은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욕심에 시인의 사진첩이나 그동안의 자료, 문집을 모두 알고자 했으나 가족들에게 흩어져 가 있거나 일부 사진은 태웠을 것이라 하셨다. 다행히 3권의 귀한 문집을 빌려 올 수 있었다. 와 산문으로 엮은 석동유거石童幽居(뜰날출판, 2005), 의공강아倚笻江阿(뜰날출판, 2010), 시와 산문, 조씨 가계도와 비문을 수록한 정한록井閑錄(뜰날출판, 2015)이다. 특히 석동유거石童幽居에는 조순 시인의 부음을 듣고 쓴  시 「떠남」과 서울 연수원 교육 때 틈을 내 만난 시가족 영도선 동인 박용수, 김경자와 회포를 나눴던 글은 그들의 이후 흔적을 짐작할 수 있어 반가웠다.

시인은 말년까지 비 내리는 날 말고는 진주 진양호 산책을 빼놓지 않았다 한다. 작품집을 읽어보면 등산과 국내, 해외여행도 활발히 했고 각종 모임에서 교류하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기를 시나 산문으로 남김으로써 문학인의 소임을 잊지 않았다. 아래는 『정한록井閑錄』에 실린 첫 시다.

집은, 텅/비어 있다//돌담은 허물어졌다//내 터/내 땅/분간도 몰라//잡초만/우수수 하다//샘물 맑아/들여다 본 내 얼굴/출렁인다//어쩌랴//돌아서자니/그리워져/뒤돌아 보인다

-조인영, 「상정에 갔더니」

시인은 고향 상정리 금동마을 선산 아내 곁에 잠들었다. 조순 시인의 유택과 이웃한 곳이다.

 

『옥적』, 기쁨의 가락

평계平溪 이정호는 1923년 의령읍 동동리 1068-2번지에서 이시목6)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령성당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현재 공용주차장이 시인의 생가 자리다. 성당 왼편으로는 남저 이우식 선생의 생가가 있었다. 광복자금을 지하에서 은밀히 조달하는 일을 맡았으나 백산 안희제 선생에 가려졌던 인물이다. 특히 국어학자 이극로를 키워낸 인물로 재조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의령 큰 인물이 자랐던 셈이다.

이정호 시인 생가터, 의령읍 동동리 1068-2, 현재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이정호 시인 생가터, 의령읍 동동리 1068-2, 현재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이정호는 경기공립중학교와 동경문화학원 문학부를 졸업했다. 부친의 재력이 뒷받침되어 일찍 고향을 떠나 학업의 길을 나섰을 것이다. 일본 경응(게이오)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가 학병을 피해 하얼빈으로 피신했다 돌아왔다. 전국문필가협회, 청년문학가협회에서 활동했으며 대구대학 국문학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문학정신 동인이었으며 외무부, 내무부, 국방부에서 장관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현대평론가협회, 경향신문, 북한연구소, 민정당 교육문화부장을 지낸 것으로 보아 문학 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문단의 조직기구, 단체활동과는 아주 담을 쌓아버렸다. 문학조직은 문학 활동을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시인의 엄격한 태도 때문이었다. 자신의 시집을 ‘살아서 내는 것은 망발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시와 산문집 『옥적(玉笛)』(한자연, 1998) 한 권이다. 산문에는 시론, 구상 시인의 시집 평론, 설창수전집 발문 등이 실렸다. 문단혁신론을 주창하였으며(『평화일보』, 1948), 문화십자군으로서 향토문화 발전을 위한 역할을 강조했다(영남예술제 축사, 1949).7)

걷잡을 수 없이 조용하여/너는 아무데도 없고/너는 아무데나 있다.//이승 저승 전생······/생멸하는 시간의 흐름에 표류하여도/너의 부드러움은 무염하다//허무에서 피어 오르는/인간의 꿈이, 어찌/이토록 전일한 형상을 이루었는가//물어뜯는 두 마리 사자의 혈투를 넘어/오롯한 신라의 원은, 지금도/우리 앞에 현존한다.//몸부림치는 비원의 꿈이여/귀신도 울어라 황천문도 깨어져라/사람과 짐승의 매디도 풀리어라.//가슴속 가락 피리를 타고/피리의 마력 만상에 옮아//하늘도 땅도 한데 얼리어/황홀한 미속에 접어드누나.

- 이정호, 「석굴암」8)

위 시는 「여무는 가을」(『서울신문』, 1949) 줄글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시인의 원천인 마음 상태를 노래하고 있다. 석굴암에 두 번 간 시인은 무엇을 보고 왔던 것일까.

시인은 온 가족이 천주교인으로(처형 베네딕다 수녀) 영세명이 아우구스티노이다. 경인년전쟁 때 부산에 피난 온 문인들을 비롯해, 부친의 사재를 털어 생활이 어려운 문인들을 아낌없이 도왔다. 시문집에 의령이라는 고향 이름이 작품 속에 녹아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탕에는 어릴 적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김윤환은 『옥적玉笛』 간행사에서 ‘고향 의령에 평계 이정호 시비가 건립되었으면 한다’ 썼다.

시인은 1997년 자택에서 76세로 영면했다. 의령 선대 묘지에 가족장으로 묻혔다. 결국 고향으로 회귀한 셈이다.

 

『피어오를 새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절절한 사부곡이 있을까. 1950년 경인년전쟁 발발 직후 경찰에 연행된 아버지가 숨졌다. 아들은 7살이었다. 조부는 부친을 일본 유학까지 보낼 정도로 깨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성장한 아들은 아버지 죽음의 그림자를 쫓았다. 글쓴이가 다섯 시인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안타까운 걸음이었다.

화정 낙동강 변을 돌아 나와 다소 허탈한 이정호 생가터를 나왔다. 긴 나날들 그들은 이 고장의 어느 길을 걷고 또 타고 다녔을까. 궁류로 향하는 길은 이제 매끈하다. 꼬불 산길은 80년대 중반 가혹한 상흔을 남기고 넓혀져 곧게 난 길에 묻혀갔다. 봉합된 상처는 계절을 타고 벌어지기도 곪기도 한다. 처음과 같을 수는 없다. 상처는 그런 것이다.

해마다 가을이면/벼 이랑 누우렇게 풍년을 이루는/옥야(沃野) 한복판인데/모여든 나그네들//쌀값 얘기로 목덜미가 마르는/경전남부선 군북역/조수처럼 밀려드는 황혼!/황혼의 외론 그림자를/저마다 끌고/쌀자루에 지친 아낙네들이/예서부터 또 어느 보헤미안의/길손이 되려는 것인가?//피곤을 동정하며/서로 어깨를 기대어도/찍힌 티케트 조각보다/더욱 허전한 삶이 거미줄을 치는 마음//기다리던 철마가 달려들면/자랑일 수 없는 우리의 여정(旅程)이 비롯하려니……/저기 콩나물국 냄새 풍기는/막걸릿집이나마 찾아가 볼까요

- 전훈, 「한역(寒驛)」9)

마치 군북역에 서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시에 흐르는 정서는 시간을 건너뛴다. 전훈 시인의 본명은 전임수다. 사건 당시 부산일보 편집부 차장이자 문화부 기자였던 전임수(당시 29세)는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좌익문화단체 ‘문화공작대’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고 정진업 문화부장과 신예균 편집부장 등 다른 기자 2명도 같은 혐의였다. 두 사람은 3~4개월 뒤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나, 전임수 기자는 당일 경찰의 고문과 구타로 숨졌다. 경찰은 은폐했고 시신을 유기했다.

1944.2.12. 전훈 시인 혼례 사진. 함흥시. 갓 쓴 분이 시인의 아버지, 그 오른쪽 첫 번째가 어머니, 가운뎃줄 장갑을 낀 이가 시인 내외, 그리고 처가 식구들
시인의 처가 식구와 가까운 이웃들. 왼쪽 아래 인물사진은 영생고보 5학년 무렵의 시인 전훈 

아들 전희구 부산국민보도연맹희생자유족회 회장은 2009년 아버지 전임수(전훈 시인)가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받아냈다. 전희구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시 6편10)과 산문 9편11)을 찾았다. 아들은 아버지 의문사를 밝히는 과정을 책으로 엮어 아버지 작품과 함께 세상에 내놓았다.

전훈 시인 생가 탐방-개량 후 타인이 거주하고 있다
전훈 시인 생가 탐방-개량 후 타인이 거주하고 있다

전훈 시인의 생가는 궁류면 보건소 건너 대숲이 병풍처럼 두른 당동마을 초입에 있다. 둘러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은 전희구 씨의 조카 전한배 씨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생가는 다른 이가 거주하고 있었다. 낯선 이들에게 선뜻 집안을 보여주며 마루 안까지 이끌어 주셨다. 부엌은 쓰임새에 맞게 달아내고 마루와 천정, 축담과 기둥은 그대로라 했다. 사진에서 보았던 가족들이 영화처럼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대가족. 문창살 앞에 갓과 양복, 한복과 교복을 입은 이들이 사진기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 서러웠던 세월을 젖히고 활짝 웃음보를 터트리며 나오길 바라며 발길을 돌렸다.

 

의령, 그리고 의령 문학

다섯 시인, 재해만·조순·조인영·이정호·전훈 시인의 생가 탐방을 마치고 나니 의령 문학지도 하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의령은 충의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뼛속 깊이 배인 고장이다. 더불어 남강 줄기를 타고 선현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시인들은 봇물 흐르듯 터져 나와 곁에 머물다 저마다 흩어졌다. 그들을 찾아 나서는 소명은 어쩌면 당연하다. 아니 벅차다.

일찍 도회지로 타국으로 떠난 탓에 시인들의 흔적은 미미하다. 그러나, 작품이 낯설기만 한 건 아니다. 각 지자체는 그 고장의 흩어진 얘기들을 모아 상품으로 만들고 있다. 의령군은 ‘천강 홍의’ 곽재우 장군의 드높은 뜻을 기리고 문학의 바탕을 늘리기 위해 ‘천강문학상’을 제정했다. 시, 시조, 소설, 수필, 아동문학 등 12회째 수상자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걸맞은 의령 출신 지역문학인을 밝히는 일에는 관심이 조금 덜한 것 같다.

문학은 일시적이거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다. 좋은 작품 좋은 문학을 발굴하여 문화가 앞자리에 서는 날이 오면 참 반가울 것이다. 의령은 이미 좋은 시인을 키워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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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임진창의 18장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 윤탁(尹鐸), 박사제(朴思濟), 오운(吳澐), 이운장(李雲長), 배맹신(裵孟伸), 심대승(沈大承), 정연(鄭演), 권란(權鸞), 정질(鄭晊), 허언심(許彦深), 노순(盧錞), 강언룡(姜彦龍), 허자대(許子大), 심기일(沈紀一), 안기종(安紀宗), 조사남(曺士男), 주몽룡(朱夢龍) 의병장으로 강나루와 산성에서 왜적들과 싸워 위훈을 세우고 순절한 이들이다. 허백영, 「어언유미 40편」, 『내 고장의 어제와 오늘』, 의령문화원, 2021, 325쪽.

2)『의령의 인물과 학문』(의령문화원)이 현재 8호까지 학술발표회 단행본으로 발간되고 있다. 옛글에서 현재의 장소를 찾아내는 즐거움은 덤이다.

3)「어른들은 모르셔요」, 『제해만 동시선집(김용희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4)조순, 『촌』, 태화출판사, 1983.

5)조인영, 『지리산 소식』, 작가정신, 1998.

6)호는 구봉. 중외일보 편집국장,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독립촉성국민회 경남도지부장, 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정치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재력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7)마찬가지로 『옥적玉笛』에 실린 글이다.

8)이정호, 『옥玉笛』, 한자연, 1998.

9)전희구, 『피어오를 새날』, 도서출판 삶과꿈, 2004. 1968년 아들 전희구가 정진업 시인에게 건네받은 전훈의 시이다.

10)「비바람과 함께, 귀로, 막차-두 번째 8·15, 피어오를 새날, 한역, .

11)「하야삼제(夏夜三題), 사기사(詐期師, 보슬비, 예술에의 향수-가을에 제함(4), 현해에 남은 이야기, 싼데-부산 창간호를 보고(신간 평), 미술의 대중화(마석으로 발표), 극장우환(劇場憂患-문화인으로 자처하는 모 선생께, 애서가의 심경(전훈으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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