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규의 포토 에세이 '우암동으로부터의 편지' (14)만식이 껍데기를 벗고서

김신규 승인 2020.02.24 12:35 | 최종 수정 2021.12.05 17:00 의견 0
내 시계가 틀렸나? 오리엔트시계인데...

뚜뚜뚜뚜우~ 정확한 오리엔트 시계가 정오를 알려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정오뉴스 입니다.  이 시간 부산 대청동 카톨릭센터에서는 범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주도한 시위에 시민 학생 등이 센터 안으로 들어가 "독재타도 민주쟁취"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 중입니다. 자세한 소식 현장 중계차에 나가 있는 안치환 기자 연결합니다. 점거농성 현장에 안치환 기자 나오세요 ...

큰방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커텐 사이로 봄을 가득 머금은 햇살은 방을 가르고 나도 가른다.

뭐 오후~12시! 

아이고라 ×됐다. 학교 늦었다 
내방 시계는 와 죽었노 ...
(나시키, 청바지집, 오징어무침, 현주 아빠, 섬마을 선생님, 청바지집 아줌마, 그리고 몽정 ... )  순식간에  장면들이 만식이의 머리를 스쳐지나 가다  '몽정'에 딱 멈추어진다. 아하, 너무나 생생했고, 간들어지고 격렬했던 간밤 현주의 속사임과 흐 응응으헝 신음의 연속은 황홀의 시간 아니었던가. 귓가에 큰방 라디오소리 만큼이나 생생하게 남아 맴돈다.  

머리를 뒤로 약간 제껴 부엌 쪽을 보니, 반쯤 보이는 엄마 뒷모습, 그냥 밥하고 있는 모습인데 미안타 그냥 미안타, 우리 엄마.
꿈에서 첫 경험한 아들 식이를 위해 끓이고 계신, 참기름 한 두 방울  떨어뜨린 김치국이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다. 그 향기는  마당에 핀 천리향의 향기보다 더 향기로웠고 햇살 가득한 마루에 몽실 몽실 김꽃 피어  오른다. 그 침샘을 자극하는 감칠맛 냄새가 엄마를 부르게 한다.

엄마 배고프다. 밥도. 
그래 상펴라 다 됐다. 니 인자 일어나 학교는 어짜노?                             
응. 밥 무꼬 가면 된다.
근데, 만식아? 아침에 현주가 왔다갔다.
현현 현주가!!! 
(아니~ 진짜 한 것도 아니고, 꿈에서 한 건데 ... 와 그라지? 또, 엄마는 와 진지하게 목소리 깔고 그것도 천천히 만식아? 하고 나를 부르노 놀래 자빠 지겠네.)

머 머 때문에 왔대?
현주가 니 보라고 책 주고 갔다.
무 무슨 책?
니 와 그리 놀래노 죄 짓나? 현주가 니 보라고 하는 건데 ...    
엄마 무슨 책? 
몰라 '껍데기 까라' ... 인가 뭔가.
엄마 뭘 깐다고?
몰라 ... 저 있다 봐라. 

수웁 후륵후록 하아 ~ 엄마 진짜 맛있다. 시원하다.
이거 김장김치로 끓인나? 와 땀나는 거 봐라 ...
밥 말아서 무봐바!  후라이 하나 더 해주까?
해도... 밥도 좀 더 주고, 엄마 김도 좀 더도. 
잘 묵네. 천천히 무라. 언치겠다, 니 니, 어지 밤에 노가다 했나. 허겁지겁 밥 무께?  
하하 그래 생노가다 했다 아이가.
(사실은 엄마 새벽에 생몽정했다 )
잘 묵네 하하.

아, 그라고
만식아 니 데모 이런 거 하지 마레이. 선배들이 하자고 해도 딱 모른척 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알았제! 엄마 말 잘 들어라. 알아도 모른 척 얍실하게 해야 한다. 엄마도 안다 나쁜 거. 군인이 정치 할라고 광주 사람들 얼마나 많이 죽였노. 미친 놈 아이가. 그래도 데모하다가 잡히가면 끝이다. 그 있자나 변호사 하는 양반이 주동자라며 변호사 하면 되지 와 저라노. 그 양반 난주 뭐 되겠노? 데모 주동자로 찍히가 빨간줄 끄이고 뻔하다. 니 엄마 하고 죽는 꼴 보고 싶으면 해라.
(나쁜 세끼들 아들들을 짋발코 때리고 뭉까 가서 잡아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나오지도 못하고. 지 세끼들은 없나 아이구 못된 놈들.)

니는 근처에도 가지마라. 인생 망친다. 얍실해라! 동참 안 하고 비겁하다는 소리 듣는 게 나따. 알았제. 집에 일찍 들어오고. 알았나 만식아!

현주가 준 '껍데기를 벗고서' 책을 들고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 운동장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깃발 아래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군부독재 타도 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 수립하자!수립하자! 수립하자! ...
임을 위한 행진곡
가열차게 노래하겠습니다
 투ㅡ쟁, 투쟁ㅡ투쟁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ㅡ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ㅡ천은 안다 
태여나서 외치는 뜨ㅡ거운 함ㅡ성 
앞서서 나가자 ...

만식이 몸도 가슴도 잠시 멈춘다.
아~ 이 찡함은 무엇인가 ... 
가슴을 여미 저 북소리는...

김신규
김신규

◇김신규는

▷전업사진작가
▷우암동 189시리즈(2002~)
▷다큐작업 외 개인전 13회
▷김신규 사진인문학연구소 소장
▷알리앙스 프랑스 초대작가
▷KBS 아! 숭례문특집 총감독
▷KBS ‘포토다큐 사람들’ 다수 진행 및 출연
▷전 아트포럼 대표
▷전 부산시 산복도로 르네상스 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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