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따라 휘날리는 학과, 동아리 깃발들. 그 중 눈에 들어온 깃발 하나, 너무 강렬하다.
운동장 스탠드에서 딱 !봐도 시커멓고 굵다랗게 쓰인 페인트가 글자 옆으로 조금 흐르다 멈춘.
민주철학, 그래 ‘민주철학’이네.
키큰 대나무 깃대 밑으로 꼬몰꼬몰 모인 학생들이 시험지 같은 것으로 봄볕을 가리며 초청연사의 강연을 듣고 있다.
(우리과 선배들인갑따)
시간 맞춰 5층 강의실로 향했다.
어~만식아 니와 늦었노?
어~그래 창호야, 일이 좀 ...
만식이 니 내한테 오늘 막걸리 한잔 사라.
와?
야, 아까 내가 출석 부를 때 니 대신 손들었다.
야아, 그랬나! 오케게이!
만식아! 근데 우짜노 들킸다. 하하하. 교수님이 "어이, 창오 니 뭐하노? 손 내리라. 내가 우리과 장학생으로 들어온 박만식이를 모르겠나!?" 하시더라. 그래도 한잔 살끼제?
창호와 계단을 내려가다 교수님과 맞딱뜨렸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왜 빠졌어 우리과 장학생이 ...
아, 예~ 늦잠, 아니 일이 좀 있어가예.
어이, 전창호. 니도 요리 온나.
니는 1학년이 벌써 대출을 해! 혼난디!
어이, 만식이 그 손에 뮈꼬?
(아! 가방에 넣을 걸 폼잡는다고 ...)
"껍데기를 벗고서."
좋다, 그러면 요번 주까지 '벗고서'를 보고, 써온다. 그러면 오늘 출석한 걸로. 창호도 마찬가지.
학생들은 대오를 짜고 교문 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힘차게 부르고 있었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ㅡ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ㅡ에 있다
무엇이 두려우ㅡ냐 출정하여라
억눌린 민중에 해방을 위해
나ㅡ가 나아가
목숨을 걸고 ...
대장같은 사람이 나팔 마이크를 왼손에 들고 마스크를 턱으로 내린 채 주먹 불끈 쥔 오른손은 하늘 향해 접고 뻗고 접고 뻗고 ...
학우 여러분! 모두 일어나 힘차고 당당하게 구호외치며 출정하겠습니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군부독재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만식이 안경 사이 눈물이 글썽한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온다.
(겁이 난다. 내 나이 스물. 난생 처음 싸움이란 걸 해본다. 맨 먼저 무엇부터 해야하고 싸움 뒤 맨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나만, 겁이 나는 걸까, 나만 다리에 힘이 없고 가슴이 뛰는걸까, 지금, 빠져나가면 안 되는 걸까 오늘만 지나면 민주가 오고, 독재가 없어지는 걸까? 손이 떨린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엄마도 보고싶다. 나는 그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라고 할 뿐이다. 그래 너무나도 잘못되었잖아!)
독재타도 독재타도 독재타도 ...
탕타탕틴따따따 페퍼포커.
시커먼 장갑차 뚜껑 위에서 연발로 날아온다. 그리고 Sy44탄 퍽퍽 퍽퍽 거리며 거의 직선으로 날아오더니 땅바닦에 부딛혀 튕겨 오르며 굴러다닌다. 지랄탄까지. 쉬이잌 세잌. 총에 장착된 시커멓고 구멍이 4개 난 것. 그 구멍 속에서 퍽퍽퍽 ㅡ퍽 소리를 내며 지랄소리를 토해낸다.
학생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순식간에 교문 주변이 매캐한 최류탄 가스로 뒤덮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불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소주병 대가리에 불을 붙인 화염병이다.
페퍼포커차 뚜껑 위 발사대 여러 구멍들을 향해 화염병이 날아간다.
퍽! 파악. 또, 날아간다.
교문 주변은 순식간에 돌과 병조각들이 난무한다. 이미 분출한 핑크색 지랄탄 구멍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른다.
뛰라, 저리 저리. 우욱, 쾤쾤. 저리가자! 저리 ...
만식이는 한 손에는 책, 다른 한 손으로 창호 손을 잡고 교문 밖으로 뛰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다. 단지 숨이 안 쉬어진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밖에. 그 와중에 만식이는 책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이미 만식이의 껍데기는 벗겨지고 있었다.
김신규
◇김신규는
▷전업사진작가
▷우암동 189시리즈(2002~)
▷다큐작업 외 개인전 13회
▷김신규 사진인문학연구소 소장
▷알리앙스 프랑스 초대작가
▷KBS 아! 숭례문특집 총감독
▷KBS ‘포토다큐 사람들’ 다수 진행 및 출연
▷전 아트포럼 대표
▷전 부산시 산복도로 르네상스 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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