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규의 포토 에세이 '우암동으로부터의 편지' (20)우리는 아침이슬이었다

김신규 승인 2020.03.30 11:13 | 최종 수정 2021.12.05 16:57 의견 0
우암동시리즈 2002  암실작업 에디션5.  김신규
'우암동 시리즈' 에디션5. 암실작업. 2002, 김신규.

만식아! 밥묵자. 
엄마, 배고프다 미치겠다.
만식이는 엄마의 김치찌개가 끓을수록 그 향기에 배고품보다 허기가 더해갔다. 

다됐다, 앉아라. 
우와! 맛있겠다!
금색에 가까운 노오란 양은냄비에 가득 담긴 김치 사이로 동그라미 안에 '上' 이란 파란색 글자가 새겨진 도톰한 돼지고기 비계와 뽀얀 두부 사이로 뜨거운 거품이 올라오며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여전하다. 빠알간 국물에 방금 넣은 대파향까지 ...

엄마! 아빠 것 남겨놨제?
어! 그래 저, 떠놨다.
고기 좀 많이 남겨 놓지?
그래, 그래 나따.   
좀 있다 야근 마치고 오실기다. 
막걸리도 한통 사나 따. 반주 하실거니까. 

근데, 니 아침부터 와 그래 기분이 좋아보이노?
뭐가? 아이다 엄마 ...
하 하 하 ... 
니 뭐 있제?
말해 봐라 ...
엄마는 못속인다이 ...
아이다, 없다니까!
엄마는 생사람 잡지 마리. 
호 호 호 ...

87년 봄, 현주와의 첫 키스는 이렇게 세월이 지났지만, 몇일 전 밤의 일인듯 항상 간직되는가보다. 
 
김치를 잘 담그시고 요리를 잘하시는 어머니를 닮아 국민학생 6학년 만식이가 끊이는 라면은 먼저 김치와 아주 약간의 된장을 넣고 물을 끊인 다음  계란 하나는 풀어, 국물을 담백하게 하고 라면과 수프를 넣고 꼬돌하게 익을 즈음 곤로 불을 꺼고 마지막에 대파와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뚜껑을 닫고 1분쯤 기도하듯 기다린 후 먹는다. 그 라면은 와! 정말 일품이었지요. 순식간에 없어져요. 만식이 라면 천재예요. 특히 그 라면국물에 밥을 말면 그냥 꿀떡꿀떡 넘어갔어요.       

기억이 엊그제 같네요. 

6학년 때 5월 월례고사를 보고 만식이집에 옹기종기 모여  시험답안을 마춰보며 라면을 먹던 그 평화로운 우암동. 우리들의  '80년 오월'이었어요. 그날이 다시오면 좋겠어요.  
아참! 그때 즈음 그것도 생각나네요.
현주를 찌뽕한다고 만식이가 자작하여 골목벽에 "만식 하트 현주"

"만식이는 현주랑 뽀뽀했대요." 

놀란 현주가 벽에 이름을 지우면
만식이는 다시 살짝 이름을 적고 ... 
동네 친구들이 흉(!?)보면 만식이는 그냥 웃었지요. 

세월이 지나 87년 봄에 우암동 어느 골목에서 참말로 뽀뽀를 하게 되었네요. 참말로 ... 하하하.

87년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라고 모두가 하나 되어 외쳤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다들 잘지내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건물들 창문창문마다 일하다 박수와 손수건 흔들어 주시던 회사원들 ,물통에 물받아 바가지로 물주시던 아줌마, 애기 업고 최루탄방어용 치약 짜주시던 새댁언니, 육교 위에서 빵 던져주시던 아저씨, 퇴근 후 동참한 노동자 넥타이 아저씨 언니들 대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나와 우리친구들 ...           

우리는 그때 진정 살아있는 시민이었요.  다들, 모두들 잘 지내시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언제가 또, 잘못됨이 있다면 또 다시 만나겠죠!
"엄마도 아빠도 그때 거기에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요."   

또, 연락드릴게요. 우암동에서 ...

김신규

◇김신규는

▷전업사진작가
▷우암동 189시리즈(2002~)
▷다큐작업 외 개인전 13회
▷김신규 사진인문학연구소 소장
▷알리앙스 프랑스 초대작가
▷KBS 아! 숭례문특집 총감독
▷KBS ‘포토다큐 사람들’ 다수 진행 및 출연
▷전 아트포럼 대표
▷전 부산시 산복도로 르네상스 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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