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규의 포토 에세이 '우암동으로부터의 편지' (21)현주와 영화보기로 한 87년 4월 어느날
김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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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17:25 | 최종 수정 2021.12.0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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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 이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들뜬 만식은 '물들 때 노 젓는' 심정으로 두 번째 키스를 계획하고 현주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만식은 라이벌인 두 사람에게 '어이, 이놈 나시키야, 물러섯거라 내가 가신다! ', '거기 키 큰놈, 네 놈도 비키거라. 나는 오늘 현주랑 영화보러 가느니라!' 하고 호령하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남포동 부영극장 앞으로 가는 26번 버스에 올랐다. 보려는 영화는 1987년 재개봉한 '백 투더 퓨쳐'.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신나게 잘 가던 버스가 진시장을 지나 오버 본 오버브릿지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 옆을 지나며 외쳤다. 태극기도 보인다.
'호헌철폐'. 저건 뭐지?
'사람들이 지나가면 버스가 가겠지'라고 버스 차창으로 구경하고 있는데 버스는 계속 멈춤이다(아이고라, 이러다 약속시간 못지키는 거 아이가! 두근두근 세근거린다. 손목의 오리엔트 시계는 어째 이래 젝각젝각 잘도 가노...).
버스 타기 전의 등등했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불안, 초조, 좌불안석이다.
아저씨! 아저씨! 저 여기 내리면 안 되예? 여, 내리께예!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어준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만식이는 얼굴과 귀 주변에 소름이 확 돋아난다. 숨 쉬는 것조차 잠시 멈춘 만식은 순간 망망대해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와~와! '호헌철폐 독재타도' .... 와와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자 .... 와와와
수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범일동 진시장 앞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 하라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재미로도 아니며 영웅심으도 이러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이건 꿈도 아니다.
약속하지 않은 약속이랄까. 때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존재한 '우리'라는 유전자, 분명 이것이 우리 몸 속에 억압에 무서워 감추어지고 오랫동안 숨겨진 이 유전자는 '정의'란 것으로 뜨거운 가슴을 통해 나온다.
와~ ...
만식은 고개를 숙이고 몰려오는 사람들 쪽으로 마주뛰었다.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듯. 오버브릿지에서 범일동 지하철 역까지. 뛰고 또 뛰었다. 버스가 못가니 지하철을 타고 남포동으로 가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보니, 무스를 잔뜩 바른 머리는 산발이 되고, 세운 옷깃은 흐트러졌다. 시계를 다시 보며 '아~ 늦었다!'
이윽고 부영극장 앞. 숨이 찬다 목도 마르다.
아~ 현주가 없다.
오마이 갓! 나의 현주 ...
◇김신규는
▷전업사진작가
▷우암동 189시리즈(2002~)
▷다큐작업 외 개인전 13회
▷김신규 사진인문학연구소 소장
▷알리앙스 프랑스 초대작가
▷KBS 아! 숭례문특집 총감독
▷KBS ‘포토다큐 사람들’ 다수 진행 및 출연
▷전 아트포럼 대표
▷전 부산시 산복도로 르네상스 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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