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인 존 키츠, 윌리엄 힐튼의 초상화(1822). 출처: 위키피디아
낡은 시대가 이 세대를 허물 때, 너는 우리의 슬픔과는 다른 슬픔 속에서 인간의 친구로 남아 그에게 말하리,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답다”라고, 이는 우리가 지상에서 아는 유일한 것이며, 알아야 할 모든 것이리니. -존 키츠, ‘그리스 옛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중
정말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일까요? 키츠의 아름다움은 예술을 이른 것일 테지만, 저는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아름다움과 진리와의 관계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아름다움은 대칭(symmetry)과 관련이 깊습니다. 물리학의 위대한 방정식들, 이를테면 뉴턴의 운동방정식과 맥스웰의 전자기방정식,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 등은 모두 ‘아름답다’는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아름다움과 진리와의 관계는 우주의 본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는 곧 우주의 법칙이 수학으로 기술되는 이유를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 아름다운 방정식이 100% 진리라고는 단언하기는 힘듭니다. 아름다움과 진리는 분명 어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아름다움이 곧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로저 펜로즈의 표현대로 '수학적 아름다움은 진리를 향한 애매한 가이드'에 불과할 지 모릅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여행을 함께 하시는 여러분, 잠시 간이역에 내려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라는 주제를 다룬 유명한 책의 핵심 내용을 음미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학과 우주와의 오묘한 관계는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
키츠가 옳았을까요?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일까요? 그 둘이 긴밀하게 연관된 까닭은, 아마도 우리의 마음이 그 둘에 유사하게 반응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학에서 가능하다고 물리학에서 가능하다는 법은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과 물리학 사이의 관계는 심오하고, 미묘하며, 난해하지요. 그것은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입니다. 과학은 어떠한 방식을 써서 자연에 존재하는 듯한 ‘법칙들’을 밝혀내며, 자연은 어째서 수학의 언어로 말하는 듯 보이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우주는 본래 수학적일까요? 그 외견상의 수학적 특징들은 인간이 고안해냈을까요? 아니면 우주가 수학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무한히 복잡한 그 본질의 가장 심오한 측면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학이기 때문일까요?
수학은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그렇게 생각하듯, 구체성이 없는 궁극적 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수학은 인간들이 창조하였습니다. 수학자들도 인간이며,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기 때문에 새로운 수학의 창조는 사회적 과정의 일부에 속합니다.
수학은 인간의 창조물 ... 궁극적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수학이나 과학은 사회 상대론자들이 종종 주장하듯, ‘전적으로’ 사회적 과정의 결과는 아닙니다. 수학과 과학은 모두 외적인 제한을 따라야 합니다. 수학의 경우 그 제한은 논리적이며, 과학의 경우는 실험이지요. 수학자들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유클리드식 작도로 각을 삼등분하길 바란다 해도, 그것이 불가능함은 명백합니다. 뉴턴의 중력 법칙이 우주에 관한 궁극적 기술이기를 물리학자들이 강력하게 희망해도, 수성의 근일점 이동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이 때문에 수학자들이 그렇게도 논리에 고집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일들에 집착합니다. 5차 방정식을 근호로 푸는 일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여러분들에게는 정말로 중요한가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역사의 판결은 명백합니다. 일상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중요합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가 5차 방정식의 가해성에 달려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풀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수학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기 때문이지요. 갈루아와 그의 후계자들이 근호로 풀리는 방정식의 조건을 이해하는 일에 그토록 집착하지 않았던들, 군론(group theory)의 발전은 상당히 지연되었을 것이며, 심지어 이론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수학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인도, 과학에 절대적인 역할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간단명료합니다. 깊이 있는 수학적 문제들에 관한 연구는, 그들이 직접적으로 응용되는 분야가 없는 듯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간과되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훌륭한 수학은 금보다 가치가 있으며, 그 유래는 대부분의 경우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수학은 처음 고안된 목적과 달리 우리를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과학기술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스 인들이 원뿔의 단면으로 연구한 타원은 화성 운동에 관한 티코 브라헤의 관측으로부터, 케플러를 거쳐,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초끈이론은 물리학과 관련이 없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수학의 한 분야로 밝혀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 양자 이론에서 사용되는 대칭은, 비록 군론이 순수수학적인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발전되었지만 여전히 자연에 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수학은 어째서 그 창시자들도 전혀 의도한 바 없는 목적에 그토록 유용할까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신은 기하학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갈릴레이도 이와 똑 같은 이야기를 했고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은 수학의 언어로 기술되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 궤도들의 수학적 패턴들을 발견하는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뉴턴은 그 중 일부를 활용하여 중력의 법칙을 탄생시켰습니다.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막대한 유용성은 신비로운 선물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수학적 사고의 놀라운 영향력에 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는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수학이 가진 ‘비합리적 효용성(unreasonable effectiveness)’에 관해 1960년 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막대한 유용성은 거의 신비에 가까우며, 그에 관한 합리적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의 언어가 물리법칙의 정식화에 적합하다는 기적 같은 일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그것을 받을 자격도 없는데 주어지는 굉장한 선물이다. 우리는 이 선물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이 미래의 연구에서도 유효하기를,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든 그것이 우리가 만족하는 방식으로, 혹은 당혹스러워하는 방식일지라도, 학문의 분야들을 확장시키길 바라야 한다.”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대칭의 역사』 이언 스튜어트 지음/안재권·안기연 옮김/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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