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거기 있으니까.”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설령 ‘그 무엇’이 있다손 치더라도 언표言表 불가능하다. 물론 ‘그 무엇’이 대중의 일상과 무관하고, 현상적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길은 끊기는 법이다.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 합니까?” 기자들은 집요하게 질문을 거듭했다. 등정에 세 번 실패 후 네 번째 원정길에 오르는 참이었다. 이에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 1886~1924)가 귀찮다는 듯 툭 던진 대답이다. 말로리 개인적으로는 ‘단지 산이 거기 있어, 단지 오르려 할 뿐’인 구체적 개인사에 대해, 기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의 등반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 건 아닐까?
왜 사냐건/웃지요(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왜 사냐고 누가 물으면, 웃을 뿐 딴 도리가 있는가. 정색으로 감정 도발하기 위한 힐문이 아니라, 진지한 물음이라면 분명 성낼 일은 아니다. 누구나 대답에 군색해질 것이다. 단, 격조 있는 얼버무림 수단이 어찌 없을쏘냐. 소이불언笑而不言, 빙그레 미소 머금을 뿐, 입은 열지 않는다. 멋이 있다. 뭔가 ‘있어’ 보인다. 마는, 시인이 선사연禪師然하지 않고, 시적詩的 표현이 아니라면 어떻게 대답하는 게 정직할까? “태어났으니까!”
젊은 시절, 지리산에 십여 차례 올랐다. 처음 몇 번은 친구들과 같이 배낭을 지고 다녔고, 다음 몇 번은 단독산행이었다. 처음에는 지리산 등정, 곧 천왕봉에 발을 딛는 게 목표였다. 이에 더해 내심 “공자가 태산을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았다”는 글귀를 곱씹었다. ‘智異山 天王峰 1915m’ 표지석이 기대어도 번개처럼 들이치는 깨침은커녕 아무 감흥도 일지 않았다. 다리쉼에 편안했고, 바람이 시원했을 뿐이었다.
산 바깥의 산도 있고, 산 너머의 산도 있다. 등정이란 목표는 애당초 허망한 것이다. 그 허망한 목표 때문에 놓친 게 하 많은가! 평소 삶터에서 만날 수 없는 풍광에도 눈길을 머물 수 없게 한다. 하물며 힘들게 한 발짝 한 발짝 옮기며 흘리는 땀의 의미를 반추해 볼 겨를이야 어디 있으랴. 정상에 서면 이런 희생들을 보상 받을까.
공자의 사유思惟에도 시틋해 할 뿐이다. 공자가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으로 우주를 관찰했다면 어떤 깨침을 얻었을까? 관측 가능한 우주의 지름은 약 28.5기가파섹(930억 광년, 8.8×10²³km)이다.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는 꼴랑(?) 1억5,000만km밖에 안 된다. 태양은 은하 중심 주위의 궤도를 돌고 있으며, 이 거리는 약 1만 광년이나 된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약 2조 개에 달한다. 이 상상 불허의 우주를 눈으로 확인한 공자는 ‘천명天命’이니 ‘천하天下’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았을까? 2500여 년 전의 사람인 공구孔丘 또한 시대의 한계에 조건 지워진 ‘시대의 아들’일 뿐이다.
뭘 바라 애면글면 등정에만 체력전을 벌이는 것일까. 친구들과 같이 배낭을 꾸리는 일은 멀어지게 되었다. 단독산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신봉에서 세석평전까지 사람 하나 만나지 않고 10시간 가까이 혼자 걷곤 했다. 세석평전에서 자고 새벽이면 반드시 천왕봉에 올랐다. 그때에는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의 노예였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정상에 들리지 않고 바로 칠선계곡을 타고 내려가 백무동에서 산간수에 발 담그고 막걸리를 즐기고 있지 않을까?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한 발 더 내딛으면 ‘개인은 모든 사람의 척도이다.’가 된다. 인간의 유·불리에 따라 만물의 가치를 재단한다. 인간중심원리(Anthropic Principle)에 충실한 프라타고라스도 250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의 금언도 이제 유효기기간이 지났다. 코로나19가 웅변하듯, 동물과 식물은 물론 바이러스까지 통틀어 지구생태계 전체적(holistic)인 삶을 영위하지 않는 한, 인간 종(species)의 미래는 없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살쯤 된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살이고, 최초의 직립보행 인류는 약 600만 살 정도이다. 한때 공룡은 지구를 2억여 년 동안 지구에 번식하며 세계를 지배했다. 그런 막강한 공룡도 6,600만 년 전 소행성 충돌로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공룡에 비하면 갓난아기, 아니 태아에도 못 미치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다? 우주 어딘가에 있는 블랙홀에서 튀어나온 공룡이 그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한데도 인류는 개인(의 이익)을 잣대로 다른 인간을, 생태계를 평가하고 호불호를 결정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개인이익의 최대치를 추구하는 ‘경제인’인 현대인이 지구상에서 인류절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무어의 법칙(Moore's law.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대략 18~24개월마다 두 배로 증가하는 것)이 적용되는 기술의 발전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고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을 ‘디지털 윤리’를 확립할 수 있을까? 낙관하지 못한다.
현 위치에서 목표지점까지 최단거리로 선을 죽 그으면 직선이 된다. 직선 위에 놓인 길이 곧은길이다. 곧은길의 소용은 목표지점 도달에 있다. 그러나 산 너머 또 산이 있고 허공 다음에 또 허공이 버티고 있듯, 한 목표는 결코 자기완결적이 아니다. 목표는 자기 안에 또 다른 목표를 이미 잉태하고 있다. 하여 목표는 실체 없는 허화虛花(빈꽃)이다. 따라서 목표와 동떨어진 꼬부랑길도 곧은길에 꿇릴 게 없는 ‘또 다른 길’이다.
어설프게나마 목표의 부질없음에 애진즉 눈을 떠, 내 걷는 길은 꼬부랑길이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눈을 감지는 않았다. 곧은길을 가는 사람을 눈여겨 관찰했다. 꼬부랑길을 걸으면서도 자기의 길이 곧은길임을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봐왔다. 얼마를 걸었을까?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지 못했지만, 꼬불꼬불 참 많이도 걸었다. 몇 걸음을 더 나아갈지 알 수는 없지만, 저물 때까지 쉼 없이 걸을 것이다. 마는, 이제 속도가 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단했다. 하여 꼬부랑길 길섶에 앉아 걸어온 길을 되짚어 생각해 보기도 한다. 돌아보면, 때론 길이 아니라 뫼로 들어서 가시덤불에 무던히 찔려 그 생채기가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때론 그 누구의 시선도 탐하지 않고 홀로 혹은 여럿이 함께 피고 지는 야생화, 들꽃, 풀꽃, 산꽃의 향기에 취한 적도 더러 있었다. 그 생채기와 향기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바탕한 ‘세상 읽기’를, 논제에 맞춰 혹은 칼럼으로 혹은 에세이로 혹은 단편소설로 옷(장르)을 골라 입으며 연재하고자 한다. 생채기와 향기와 세상 읽기가 어떤 옷차림으로 선을 뵈든, 이는 오로지 ‘너와 나, 우리,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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