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명문 사학’을 자처하는 두 대학교가 개교 이래 처음으로 교육부 종합감사를 받았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이경태 전 연세대 부총장은 딸을 대학원에 부정 입학시켰다. 입학전형에서 서류심사와 구술시험의 점수를 조작한 것이다. 고려대의 두 교수도 자녀에게 자신의 과목을 수강하게 하고 A학점을 줬다. 그러나 정작 성적 산출 근거인 답안지는 제출하지 않았다.
더 기막힌 건, 여성 종업원이 나오는 유흥업소에서 즐기고, 그 비용을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조성된 교비로 처리한 일이다. 고려대 보직교수 등 교직원 13명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서양음식점으로 위장한 강남 소재 유흥업소에서 221차례(1인당 1~86차례)에 걸쳐 법인카드로 6693만 원을 결제했다. 연세대 부속병원 연세의료원에서도 교직원 14명이 유흥업소와 단란주점에서 45차례에 걸쳐 1669만 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했다.
국내 굴지의 대학교와 그 교수들이 이러할진대, 우리나라 모든 대학교과 교수들은 죄다 썩은 것일까? 어떤 조직에서든 ‘썩은 사과’가 있기 마련이고, 용과 뱀이 함께 있다. ‘땡초’ 탓에 부처를, 사이비 목사 때문에 예수를 부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들 마음속에도 천사와 악마가 함께 똬리 틀고 있지 않은가. 다만, ‘대학교’와 ‘교수’라는 미명美名에 우리의 신뢰를 몽땅 일임하고 민주적 통제를 가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그 일부는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는 사실은 명심하자.
온 놈이 온 말을 하든 말든, 대학은 지성과 미래 창조의 간성이다. 뉘가 섞인 쌀독일지언정 교수와 교직원은 그 간성의 파수꾼이다. ‘기레기’를 넘어 ‘기더기’(기자+구더기)라 한다. 그렇지만 기자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대학과 교수와 기자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크다 보니, 우리의 절망감도 깊다. 그러나 자문해 볼 일이다. ‘대학과 교수와 기자가 망가지는 데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협조하지 않았을까?’ 분명한 건, 우리의 기대에 걸맞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교수와 기자가 ‘유흥업소 교수’와 ‘기레기’, ‘기더기’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내일 아침에 해가 또다시 둥실 뜨듯, 세상은 지금 그래도 비틀거리나마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게 그 방증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천절 집회, 일부 시민단체들이 기어이 결행했다. 인륜과 미풍양속마저 보류하고 ‘방역 추석’을 거국적으로 추진하는 마당에, 그들의 ‘참을 수 없는’ 주장이란 뭘까? 기자회견문이나 성명서에 저들 주장의 고갱이가 들어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퇴진 촉구’,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북한의 남쪽 연락책, 문재인은 즉각 하야하라’, ‘문재인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이용해 우리의 생명인 자유를 박탈했다. 경제실정을 코로나19에 전가했고, 코로나19를 이용해 4·15 부정선거를 저질렀으며 광화문 집회를 탄압했다’, ‘야외집회는 바이러스 확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재인 정권 국민 규탄 대회를 정부가 원천봉쇄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임을 유감없이 드러낸 폭거다’ 등등.
진위(facts) 여부는 일단 접어두자.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이성적으로 이 주장들에 공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개혁적 보수’는 비문非文이 아니다. 그러나 ‘합리적 보수’는 ‘역전앞’과 같은 동어반복이기에 비문이다. 본시 보수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여 개천절에 집회하는 저들은 보수가 아니다. 보수를 참칭한 극우, 극단적 세력일 뿐이다.
저들의 집회와 광란적으로 난무하는 저들의 주장에 아파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문재인 정권? 진보 세력? 아니다. 이 땅의 진정한 보수 세력이다. 우리의 정치지형은 단순하다. 극우와 극좌를 뭉뚱그려 도매금으로 보수와 진보에 배분한다. 보수가 저들 집회의 후과를 고스란히 덤터기 쓴다. 한데도 ‘국민의힘’은 저들과의 결별에 힘을 쓰지 않는다.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이유를, 보수를 자처하는 정당이 정말 모르는 것일까? 작은 것을 탐하면 큰 것을 잃게 되고, 작은 이익을 챙기다 보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小貪大失, 見小利大事不成). 이래서는 정권 창출?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불행한 일이다. 정녕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강력한 보수·야당이 존재해야 진보·여당이 독선으로 흐르는 물꼬를 막을 수 있다. 이런 정치지형이 형성되어야 양 세력 간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국리민복이 자연스럽게 향상된다. 그러나 현실은, 이 땅의 ‘이른바’ 보수 세력들은 수구 언론과 손잡고 ‘기-승-전-문재인 때리기’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감정이입(感情移入.empathy)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는 것을 자신의 부정으로 받아들인다. 또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주변부로 내몰리면 극단세력으로 변모하기 쉽다. 대개 이들은 음모론(conspiracy theory)이나 가짜뉴스의 포로가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배척받거나, 자신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하며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으면, 되레 더 강하게 반발한다. 음모론과 가짜뉴스에 더욱 매달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을 들어주고, 때론 공감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극단적인 주장이 극단적 행동으로까지 발전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어차피 이들도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웃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간 이해상충을 전제한다. 갈등은 필연적이다. 민주주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어찌 민주사회를 누릴 수 있으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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