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만 좀 더 잘 생겼으면······.” 하고, 까르르 웃는다. 옆에 친구들도 ‘맞아, 맞다’하면서 덩달아 거칠 것 없이 웃어젖힌다. “선생님의 실력도 좋고, 수업도 재미있게 하고, 배도 안 튀어나와 몸매도 죽인다. 한데······.” 한껏 설레발을 치다가 약간 뜸을 들였다. 이윽고 본문으로 나온 말이다. 이거 원 참. 그래서 선생님이 좋다는 뜻이야, ‘잘 생기지 못해서’ 그저 그렇다는 뜻이야? 여중 2학년생들의 때 묻지 않은 웃음소리에 내 웃음을 보태면서, 나는 제법 인기 있는 교사라고 좋게 받아들였다.
학교를 여고로 옮긴 후, “브룩 실즈(Brooke Shields. 1965~)가 사랑을 고백해 와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자, 여고생들은 하나같이 “에~, 에~. 선생님 말도 안 돼요” 하며 야유를 보냈다. 수업 중에 어떤 맥락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한 말’과 ‘여고생들의 반응’을 또렷이 머릿속에서 불러낼 수 있다.
브룩 실즈는 1990년 전후에는 세계적인 배우였다. 183cm의 늘씬한 키에다 긴 머리, 육감적인 몸매, 고혹적인 눈빛의 대스타였다. 그의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는 여고생들도 많았다. 일개 교사에 불과한 ‘못 생긴 선생님’과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미모의 여배우’와의 사랑, 여고생들의 상상력 너머의 일임은 분명하다. 그들이 야유를 보낸 구체적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 브룩 실즈가 선생님한테 사랑을 고백할 턱이 없다. 둘째, 고백을 받으면 선생님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한데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턱도 없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여고생들의 판단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때 나는 왜 이런 가정법의 문장을 구사했던가?
내 ‘세상 인식과 해석’의 발달사를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 그 그래프는 우상향이다. 인식과 해석의 틀에 무시로 수정과 정정을 가한다. 그 작업이 내 일상이다. 그러니 시간과 세월에 비례해 그 틀은 더 정교해지고 조금씩이나마 제대로 된 꼴을 완성해 간다. 브룩 실즈에 관한 가정법을 말할 즈음에 내 정신은 이 그래프의 어디쯤이었을까?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이론을 읽고 있을 때였을 성싶다. ‘독서 엄숙주의’에 포박된 탓이다. 과학의 발전에 비례해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는 거듭 추락해 왔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에 의해, 우주의 중심에서 태양의 한 행성에 불과한 지구로 추락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그 지구에서도 원숭이나 침팬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동물의 한 종일 뿐임이 폭로되었다. 나아가 이 ‘쪼그라든’ 인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내가 내 주인이 아닐’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류사에 ‘지적 혁명’을 일으킨 저작을 아니 볼 수 있으랴, 는 강박감으로 읽은 것 같다. 본능적 자아(id)-현실과 타협한 자아(ego)-현실을 뛰어넘는 자아(superego)의 삼분법에 그때는 현실적합성도 고려치 않고 마냥 ‘지적 흥분’을 느꼈다. 하여 너희들은 선생님을 ‘이드적 인간으로 판단하고 야유를 보내지만, 선생님은 적어도 슈퍼에고를 지향하는 에고이다’고 내심으로 반박한 것이다.
연기는 근본적으로는 ‘거짓’이다. 나이팅게일을 연기한다고 해서, 그 여배우가 나이팅게일의 미덕을 갖출 수는 없다. 한데도 영화를 떠나 일상에서도 나이팅게일의 미덕을 지닌 양 행세하기 십상이다. 특히나 인기의 바탕이 미모이면, 그 미모 유지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사랑의 상대로서 ‘미모의 여배우’는 이중적으로 불리하다. 본질과 형식(직업)은 가능한 한 거리가 좁은 게 바람직하다. 된장국들 끓이는 데는 뚝배기면 그만이다. 굳이 황금그릇이 필요하랴. 거짓이 직업인 사람, 치열한 자기반성이 없으면, 남에게 보이도록 꾸며진 자아를 ‘참자아’로 착각하기 쉬운 사람이다. ‘거짓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 그건 낭비에 다름 아니다. 넘치는 상대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낭비를 지켜보고, 일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 그걸 어찌 ‘사랑’이라 이름에 값하는 일이겠는가!
“선생님이 돈만 좀 있었으면······.” 찻집 여주인장이 진지하게 안타까워한다. 교장은 못 되었더라도 정년퇴임으로 연금만 확보했더라도 다시 좋은 인연을 만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역시 나이가 드니 ‘얼굴’보다는 ‘돈’이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몸단장을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봉건시대의 교훈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과거시험까지 없었다. 하여 군주가 알아서 써주지 않으면, 선비는 평생 초야에 묻혀서 학문과 웅지를 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러한 판에 등용해주는 군주에게 어찌 목숨을 걸지 않으랴.
젊은 시절에 주로 앞 구절에 주목했다. 현대에는 누가 알아주고 자시고가 없다. 자신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 하여 가장 자기다운 일에 올인(all-in)한다. 논리상으로 아무 모순이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흠투성이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 했던가. 영리한 토끼는 도망갈 굴을 세 개나 파둔다. 곧, 플랜A와 플랜B에다 플랜C까지 세워둔다는 말이다. 나는 영리는커녕 무모하기만 하다. 그래서 플랜A에 모두 걸기를 해 버린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찻집 여주인장의 말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 여자 쪽 입장만으로 판단하는가? 요즘은 뒷 구절에 관심한다. ‘여자는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몸단장을 한다.’ 그런가? 불세출의 역사가 사마천이 의미의 외포가 넓어 애매모호한 단어, 사랑이란 말을 썼을까? <사기열전>을 꺼내어 원문을 확인한다.
‘女爲悅己者容’ 그러면 그렇지. ‘기쁠 열悅’를 사용했다. 곧,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몸단장을 하는 것이다. 얼마나 구체적인가!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용은 그리기 쉬워도 눈에 보이는 뱀은 그리기 어려운 법이다. 추상적인 사랑은 하기가 쉽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향기와 빛깔에 맞는 기쁨이 있다. 내 기쁨이 네 기쁨이 아닐 수도 있고, 네 기쁨이 내 기쁨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지속가능하고 돈 너머에 있는 기쁨은 은근하고 은미하여, ‘준비된’ 자가 아니면 누릴 수 없다. 그 존재함을 파악하기도 어려우리라.
외손뼉으로 소리를 낼 수 없다. ‘현재의 나’의 기회비용이 돈이다. 곧, 돈을 희생하여 현재의 나를 일군 것이다. 한 손에 떡 두 개를 다 쥘 수 없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 마주 보며 어찌 길을 가랴. 같은 방향으로 봐야 먼 길을 갈 수 있다. 하여 치수 맞지 않은 길벗과 함께 가느니, 차라리 혼자 허위허위 걷는 게 나그네의 무게 아니겠는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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